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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내륙 운하(이상돈)
    모르는세상얘기들 2007. 7. 24. 23:06


    미국의 내륙 운하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 난데없는 운하 논쟁

     

    21세기 초 한국에 이명박 씨 덕분에 난데없이 운하를 둘러싼 토론이 한창이다.
    21세기에 운하 건설이 대통령 선거에 주된 공약으로 등장한 것 자체가 그야말로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지만, 여기서 그런 정치적 논쟁은 하지 않기로 한다.
    운하는 경제성 측면 뿐 아니라 환경성에서 큰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운하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이명박 씨는 환경단체에 대해
    일전(一戰)을 선포한 셈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명박 씨의 한반도 운하는 ‘국운(國運) 융성의 계기’가 아니라
    ‘환경운동 융성의 계기’를 조성할 것으로 보인다.
    천성산 도룡룡 사건으로 침체에 빠진 환경단체는 호재를 만난 셈이다.

    운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무나 유명한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 같이 대양을 잇는 운하가 있다.
    둘째는 관개 또는 배수용 운하가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뉴올린스가 침수하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도시 운하도 이런 것들이다.
    셋째는 바다 보다 낮은 땅을 개간하여 도시와 농지를 건설하는 경우에
    교통로로 건설한 운하가 있다.
    바다 습지를 파서 도시를 건설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국토가 해수면 보다 낮은 네델란드의 운하가 그런 것들이다.
    넷째는 내륙 운송을 위해서 하천과 호수, 하천과 하천을 잇는 내륙운하가 있다.
    성격상 내륙운하는 건설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기 마련이라,
    경제성과 환경성이 문제가 된다.
    이명박 씨가 구상하는 ‘한반도 대운하’는 마지막 카테고리에 속한다.

     

     

     

    2. 역사 속의 운하

     

    바다처럼 넓고 긴 강과 역시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많은 미국은
    한때 운하건설이 성행했었다.
    운하를 통해 호수와 강, 강과 강을 잇고, 궁극적으로 바다와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륙 운하는 이제 역사의 유물(遺物)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내륙 운하로는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세무관이던 사람이 사재를 털어

    세운 미디 운하와 지난 1992년에 완공된 마인-도나우 운하가 있다.
    미디 운하는 오래 전부터 한가한 사람들이 유람하는 곳으로 전락했고,
    마인-도나우 운하는 개통 후 계속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마인-도나우 운하가
    ‘바벨 탑 이후 가장 무식한 토목공사’였음이 밝혀지자 1997년 프랑스 정부는
    라인-론느 운하 계획을 백지화 해 버렸다.
    마인-도나우 운하에 대해서는 홍욱희 박사가 지난해에 본지 지면을 통해
    그 허구성을 파헤쳤기에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운하에 관해서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하나의 추세를 보여 준다. 내륙 운하는 철도의 등장으로 쇠퇴했고,
    철도는 자동차와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쇠퇴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아래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내륙 운하를 소개하고자 한다.

     

     


    3. 에리 운하

     

    미시시피 강, 오대호(五大湖) 등 큰 강과 호수가 많은 미국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많은데,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운하를 하나 뽑으라면

    단연 에리 운하(The Erie Canal)이다.
    18세기 말 미국 동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서양 연안과 북미 대륙

    내륙을 잇는 물길을 만들 수만 있다면 중서부 평원(平原)을 보다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허드슨 강의 상류 지점인 올바니에서 에리 호 연안의

    버팔로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자는 구상이 나오게 됐다.

    올바니에서 버팔로까지 거리는 거의 360마일에 달했는데,
    올바니보다 에리 호(湖)의 수면이 600피트나 높은 것이 큰 문제였다.
    당시로선 360마일이나 되는 운하를 파고 50개나 되는 갑문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대통령이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 계획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면서
    연방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무모해 보였던 운하 계획은 드위트 클린턴 뉴욕 지사의 관심을 끌었다.
    클린턴 지사는 뉴욕주(州) 의회를 설득해서 1817년에 드디어 예산

    700만 달러를 얻어냈다.
    공사는 곧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하도 무모해 보여서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의 바보짓(Clinton’s Folly)’라고 불렀다.
    울창한 나무를 제거하고 도랑을 파는 어려운 작업을 부지런히 해서

    1825년 10월26일,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었다.
    클린턴은 버팔로에서 바지선(船)을 타고 9일간 항해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

    도착했다.
    뉴욕 시민들은 클린턴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환영했다.

    에리 운하의 완공은 대단한 영향을 가져왔다. 중서부로 들어가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고, 에리 운하와 허드슨 강을 따라 도시가 들어섰다.
    뉴욕 항(港)은 다른 도시를 젖히고 미국 제1의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1835년부터는 증가하는 물동량을 수용하기 위해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1905년에서 1918년 동안에는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가 다시 이루러 졌는데,
    원래 운하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1억 달러 예산을 들여 운하를 새로 건설했다.
    원래의 운하는 ‘올드 에리 운하(The Old Erie Canal)’라고 불리게 됐고,
    많은 부분은 버려지거나 매립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됐다.
    1918년에 새로 준공된 에리 운하는 다른 운하와 함께
    ‘뉴욕 바지 운하(New York Barge Canal)’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1831년에 올바니에서 에리 운하를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고,
    1842년에는 버팔로에서 올바니에 이르는 전구간(全區間)에 걸쳐 철도가

    완공되었다.  에리 운하는 철도와 경쟁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럼에도 운하는 철도보다 열 배나 많은 화물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1951년 이후 운하를 이용하는 화물 물동량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2차 대전 후에 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운하는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에리 운하는 전적으로 관광 유람선과 자가용 보트를 타는
    레크리에이션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1992년에 ‘뉴욕 바지 운하’는 그 명칭이 ‘뉴욕 운하 시스템’으로 바뀌고
    운영권은 뉴욕주 유료도로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2006년 여름에 뉴욕 북부에 대홍수가 나서 운하의 중간부분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4. 체사피크-오하이오 운하

     

    조지타운 대학이 자리잡은 미국 워싱턴의 조지타운 지역은 유서 깊은 건물과

    우아한 상점, 그리고 훌륭한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레스토랑과 상점이 즐비한 뒷 쪽에 좁은 물길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하천이 아니라 체사피크-오하이오 운하라고 부르는 인공물길이다.
    1828년에 공사를 시작한 체사피크-오하이오 운하는 워싱턴의 조지타운에서

    시작해서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 경계지점인 컴버랜드까지 184.5 마일에

    달하는 데, 원래는 피츠버그까지 건설해서 오하이오 강과 이을 계획이었다.
    1850년에 컴버랜드까지 운하를 건설하고 보니 이미 철도가 개통되어서
    운하는 경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운하를 건설한 회사는 내룩의 석탄을 실은 바지가 워싱턴에 가는 것으로 간신히
    지탱해 오다가 1924년에 홍수가 나서 운하가 완전히 파괴되자 운영을

    포기하고 말았다.
    1938년에 연방정부가 망가진 채로 방치된 운하를 인수해서 운하와 주변

    부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배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는 운하의 주변에는 숲이 울창해져서 적막한

    분위기 마저 풍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방정부는 쓸모없게 된 이 운하의 부지에 도로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그런 계획에 반대했는데,
    그 중에는 연방대법원의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하이킹에 참가했는데, 그 중 오직 9명만이

    182마일을 완주했다.
    현직 연방대법관인 윌리엄 더글러스가 전 코스를 완주한 9명중 한 명이어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방정부는 도로 건설계획을 포기했고,
    1971년 1월에 이 운하와 주변은 체사피크-오하이오
    국립역사공원(Chesapeake and Ohio National Historic Park)으로 지정되었다.
    경제성에서 처음부터 실패한 운하가 역사유적지로 보호받게 된 것이다.    

     

     


    5. 오하이오-에리 운하

     

    미국 건국 초부터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오하이오 강과 오대호의

    하나인 에리호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끝내 이 운하 건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뉴욕 주지사이던 드위트 클린턴이 에리호와 허드슨 강을 잇는 운하를

    뉴욕 주 예산으로 건설할 터이니 오하이오 주도 에리호와 오하이오 강을 잇는

    운하를 건설한 것을 요청했다.

    1822년에 오하이오 주의회가 운하 건설예산을 배정하자 공사가 시작됐다.
    여러 차례 예산을 추가로 배정해서 1833년에는 308마일에 달하는 운하가 완공됐다.
    물동량이 많았기 때문에 이 운하는 1860년경까지는 운영이 괜찮았다.
    그러나 1860년경부터 철도가 운행을 시작하자 바지 물동량이 사라져 버렸고,
    운하는 그대로 방치돼 버렸다. 그 후 주정부는 운하로 흐르는 물을 공급해서

    약간의 수입을 올렸다.
    1913년 3월 오하이오에 큰 홍수가 나서 운하는 순식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 이 운하는 군데군데 움푹 파인 구조물과 개천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어
    하이킹 장소로 쓰일 뿐이다.    (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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