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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찾아서 - 갈정웅 시인시가 있는 사랑방 2012. 7. 29. 00:02
시/인/을/찾/아/간/다/25 갈정웅
▣ 시인의 약력
·1945년 강릉.
본명 ; 제갈정웅, 필명 ; 갈정웅
아버지 갈수봉(葛壽奉). 어머니 최명옥(崔明玉). 아버지 시인의 나이 5才 때 철도공무원으로 봉직하시다 복막염으로 사망. 아득한 세월 그때는 6·25였단다. 홀어머니 3남매를 데리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시다. 시인이 장남.
·1961 강릉사범병설중학교 졸업
·1964 경기고등학교 졸업
·1972 서울大 商科大 졸업
·1988 美 University of Illinois 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1974~79 일본에서 컴퓨터 교육 연수. 말하자면 컴퓨터 1세대에 해당된다.
·1978 <시문학>으로 시인 데뷔
·1990 현재 ; 대림산업(株) 이사
☆1962년 한글시 백일장 문교부장관상 수상. 당시 중학교 2학년 생
·1991 저서 『기업도 상품이다』―명진출판
·1991 역서 『M&A기업의 연금술 』―(주)유나이티드건설팀 그룹
미래의 발목에 매달린 나를 찾아서
XXX(시인)
道路 工事場 ―쿠웨이트에서
- 葛政雄
(갈정웅 대림대 총장)
그레이더의 번뜩이는 삽날 끝에
조상들이 물려준 헐벗음이
한켜 한켜 잘려 나가고
탬덤로울러가
사무치는 그리움을
지긋이 눌러 잠재우는
이국의 도로 공사장
때로는
바람결에 묻어온
고향 소식에
불면의 밤을 뒤척이면서
우리가 건너야 할 사막길이
너무도 아득하여
진한 아픔이 된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이 힘겨운 노동이
언젠가는 넉넉히 생활을
지탱해 주리라 믿으며
검은 아스팔트와
뜨거운 불볕과
몰아치는 모래 바람을 섞고
또,
우리의 건강한 땀방울을 섞어
내일로의 길을 열리라.
나비꿈을 꾸던 장주(莊周)가 하품을 한다. 심심파적이 심했던가. 그가 말하는 유유자적의 물고기를 닮았던가. 혜자(惠子)와의 논쟁에서 터진 입언저리를 간신히 꿰매었는데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길이는 있으되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시간이로다(有長而無本剽者 宙也)- 莊子
그러하다. 애초에 시간의 실마리는 그 가닥을 그려 잡을 수 없음이라. 부질없는 매듭을 지음이니 저어기 큰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한 바가지의 물과 같은 것. 태평양 한가운데서 한 컵의 물을 취하고서는 이 물이 이 바닷물의 시작이거나 끝이었다고 명명할 수 있는가.
그래, 누구나 무궁(無窮)과 무위(無爲)와 무시(無始)의 경지에서 노닐 수 없다. 세속의 고린내를 긁어 파먹으며 살아가는 가련한 중생에게는 첫 눈이 있고, 첫 발자국을 정성 들여 찍는다. 둘째 셋째와 아무런 차이점이나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길었다.
이 글은 필자에게는 12번째라는 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가게 된 40대 시인인 셈이다. 내친김이다. 몇 자만 더하자.
그동안 시인들이 안겨준 시집이나 평론집 등은 적어도 500쪽은 꼭 읽었다. 심지어 허영자 시인의 시집은 한 권을 세 번씩이나 읽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시편을 9번은 읽은 셈이 된다. 왜냐고, 절제의 시어들로 하여 시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형기, 이근배 등의 시인 편에서는 시작법에 대한 무언가를 들추어내기만 하고 끝내 말하지 않았다. 왜냐 첫째, 필자는 서평을 하는 전문인이 아니라는 것과 그러한 자격이나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필자는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시를 쓰기는 하지만 시 쓰기에 대해서는 동물적으로 배웠다. 필자가 지닌 동물적 후각과 무식함이 때로는 필요이상의 번다함과 자극을 내던질 가능성 때문이다. 또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을 때 "글쓰기의 정체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쓰는 자의 자기 자리 매김. 아아 아무도 모르리라. 부어오르는 손목보다 더한 내밀의 고통을. 이럴 때는 이렇게 둘러가자. 빛이 없음(無有)에게 물었다. 당신은 존재하는 건가요, 아닌가요(夫子有乎 其無有乎, 장자)
강남의 노른자위 땅, 대치동 사거리를 돌아서면 아담하고 소박한 이층양옥. 아 후박나무의 넉넉한 잎새. 먼 날의 그리움. 태내음의 편안함, 햇살까지도 펑퍼짐한 엉덩이를 걸치고 안온의 하품을 게워내는 것 같았지.
시인은 시골서 올라온 외사촌동생을 맞아들이듯 넉넉한 미소를 뜰 안 가득 채우는 거였다. 그런데 웬걸. 엘리트 코스만 밟았다는 수재는 다르단 말인가. 자아정체성의 고뇌만 주문을 외듯, 아니 읊조리듯이 되뇌었다.
"바를 정(正)자를 파자해 보면 한 일(一)자 아래로 그칠 지(止)자로 되어 있어요. 한 곳에 머물러 있음이 바르다. 한 길로 가는 것은 바르다는 뜻이 됩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요.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一以貫之)도 正으로 가는 길인가요. 또 그래요 기업(企業)이란 또 뭐냐. 사람(人)이 한곳에 머물고(止) 일(業)을 한다는 뜻이 됩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요." "제가 대학을 다닌 이후로 주욱 두 분 선생인의 길을 생각하지요. 조순 선생님과 변형윤 선생님 말이요."
탐방자가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몇 번이나 사양하는 거였다. 뭐 제가 그러한 자리매김에 놓일 수 있는가고.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겸손이었다. 그런데 조순·변형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크나큰 자락에서 무럭무럭 자란 양질의 대들보였던 셈이다. 세상에 조순 선생님 댁에서 가정교사까지 했단다. 그 분 댁에서. 큰 분을 가까이서 모시는 기쁨보다 더함이 있을까? 필자는 그렇다. 퇴계 선생님 댁에서 청지기라도 하면서 그 분 글 얽는 거라도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아아.
"변형윤 선생님께서 그러시대요, 대학시절 무슨 대의원 의장인가 됐지요. 그래서 책상을 쌓고 데모를 하는데 변 선생님께서 부르시더군요. 독립 운동하던 선배들을 보니까 머리에 든 사람은 조국에 봉사하는 인물로 안겨줘야 하는 부담만 남더라 이러시면서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하시더군요. 게다가 당신께서도 자리 유혹이 있었으나 주욱 이 길로만 갔다. 스스로의 꼴을 무너뜨리는 이들이 너무 많았는데 당신께서는 스스로의 네모꼴을 갖고 한 길로만 갔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 그런 적이 있었던가. 70~80년대의 건널목에서 필자도 변형윤 선생님의 저서를 끼고 다녀야 멋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조순 선생님은 다른 길을 걸었었지요. 학계나 관계 두루 편렵하시며 두 길을 간 것 같아요."
그럴까. 조순. 그분이 두 길을 걸었을까. 필자도 귀뜸으로 안다. 그리고 그분의 <경제학원론>으로 학점까지 땄으니 사숙(私叔) 관계에 놓인다. 지난해였던가 서울대학교 최초의 총장 선거 말이다. 조순 선생님은 대제학 자리를 영의정도 마다한다는 그 자리를 사양하셨지. 그때의 감동 말이다. 아, 말하지 말고 기억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자. 세속의 선거가 어떠한 지. 그러했던 조순 선생님의 걸으신 길을 두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경세치용의 큰 길을 말하는 경제학 말이다. 경(經)은 그만 두고 제(濟)만 말하자. 건너다, 다스린다, 구제한다라는 뜻을 이루는 파자를 해 보자. 물 수(水)에 나란할 제(齊) 물이 만물에게 사심이 없듯이, 물이 꼭 같듯이, 경세의 길, 학문의 길, 선비의 길, 한 길로 수렴되는 길을 걸으신 분이 아닐까?
"6공 이후에 기업을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정신이 없는 사람이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뭡니까? 기업체의 이사와 시인이라는 자리매김. 그래서 시를 쓸 수가 없었어요…… "
아하 이거였구나. 시인과 사장. 자아정체성의 위기. 느릿느릿 세상사에 찌든 가늘고 긴 주름살 사이로 눈물이 쏟아 질 듯 금새 젖어있는 시인의 눈동자. 어쩌면 시인의 고민은 이 시대의 문학의 방향설정과도 같은, 이 시대와 문학의 정체성과 동일하지 않을까. 시인은 길고 긴 기업 얘기 끝에 정체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 저는 기업성선설이라는 거 생각해 봤습니다. 기업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기업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을 둘러 싼 환경이 문제지요. 정치권력이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악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6공 들어서 말이지요. 일반인들은 이 기업의 범위 밖의 적선 활동을 요구합니다. 냉정히 따져봅시다. 기업의 존재이유는 이윤에 있습니다. 이익을 남겨야 세금도 내고 길도 닦고 집도 짓고 밥도 먹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기업에게 선(善)한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을 다시 주어야 합니다. 기업이 매도되면 자본주의의 근본이 뒤흔들리고 생산이 위축됩니다 "
그래 좋다. 기업체 사장으로서의 시인의 변명이라고 매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탐방자가 진정으로 느낀 것은 깊은 신뢰감과 안도감이었다. 이러한 전문 경영인이, 기업과 조국의 미래를 끌어안고 자아정체성의 상실감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은, 어쩌면 이 나라의 축복이 아니겠는가고.
기업의 자기반성. 이건 잘 모르겠다. 철학의 자기반성으로 눈을 돌리자. 우리는 안다. 뉴튼,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등이 중세의 형이상학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는 것을. 그리고 철학자들이 깊고 어두운 심연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칸트(I. Kant)말이다. 그의 순수이성비판을 짧게 줄여 보자.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 즉 그의 형이상학이 인간이성의 제약과 한계를 밝혀주지 않았던가.
그렇다. 갈정웅 시인이 기업이란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는 자기한계의 선언이 기업정신과 자기반성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기업외적인 적선사업은 정치, 문화, 등의 소관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기업에게서 적선행위를 기대하는 것은 중세의 세 가지 위대한 형이상학-영혼의 불멸성, 하느님, 자유-을 해결하라고 떼를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필자는 시인의 말을 들으면서 중요한 기업의 역할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즉 기업은 미래와 싸운다는 것이다.
미래, 미래, 미래와,
"거 기업 합병이다. 문어발식이다 하는 거 있죠? 그게 늘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선진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일어나던 일반적인 거죠. 즉 기업은 상품이다. 그래서 책 한권 썼습니다."
"일본에서 최근 M&A(mergers and acquisition)에 대해서 연구한 걸보면 기업이란 근본적으로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명치유신 이래로 100大 기업의 흥망사를 연구해 본 결과 2가지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제1법칙은 기업의 수명은 30년이라는 것. 제2법칙은 주력업종이 70%가 넘으면 사양하는 기업이라는 거죠..... 한 가지만 계속하면 기업은 망하더라...."
이런 말을 들을 때 시인들은 말한다 등줄기를 가르는 면도날 소리가 들린다고, 경제에 대해서 비전문가들은 이렇게 들었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3대째 4대째 가업이 내려온다고, 우리에겐 그게 없다라고, 그런 상식이 깡그리 뒤짚어지다니. 그러나 기업가 시인은 그 정도로 그만두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업은 변화를 따라가면 안 된다. 변화를 예측하고 살아가야 된다."
변화를 예측한다. 미래를 예측한다. 때 아닌 결정사관의 실제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낭패였다. 그렇지 않는가. 칼 포퍼(Karl R. Popper)에게서 주워 들었다. Marx는 엉터리다. 공산사회의 필연적 발전이 과학적으로 예측된다는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의 결정론은 웃기는 얘기라고, 필자도 그렇게 알았다. 봐라. C·C·C·P(소연방)은 어제의 꿈이 되고 말았다. 콜링우드(R G Collingwood)는 그의 역저 『역사철학론(Essays in the Philosophy of History)』에서 열변을 토한다-역사란 주어진 한계 내에서만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주어진 한계 내에서 우리의 환경을 연구함으로써 현재를 나타낼 수 있으며, 미래는 숨겨져 있다. 아니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숨길 것도 없다. 이것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의 끝이 언제이며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행복이 기쁨과 고통의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합계 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하우저(Arnold Houser)였던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쓴, 눈을 부라리고 굵은 힘줄을 세우는데 능했던 대머리 남자, 그래 이제는 누구나 그 정도는 안다. 예술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형식과 내용의 결합과 창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부추김에 넘어가도 좋을까? 예술에 있어서 양식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보다 앞선다고. 문학, 미술, 음악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놈들에게 무익하고 별 볼일 없는 짓거리에 평생을 종사하도록 만든 속임수가 아닐까. 한 때는 장인(匠人)에 불과하던 놈들에게 천재라는 굴레를 세우고 광대 노릇을 하게 만든 말들이 있었다. 너희들은 가장 예민한 촉수를 가졌거니 식물체의 뿌리골무처럼 미래라는 젖을 먹고 자라거니 너희들의 창조력이야말로 내일과 자유를 표상한다고. -필자는 시인의 조용조용한 말씨에 짓눌리면서 자아정체감의 상실을 맛보았다. 가슴의 옥죄는 공포가 밀려온다. 소크라테스 앞에서 반대논증(Elentik)의 쇠사슬에 묶인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라. 거창한 줄 알았던 철학도, 정신의 자유와 창조력에 대한 특권을 가진 것처럼 설쳐대던 예술까지도 미래의 젖을 빠는데는 실패했다. 90년대의 문턱을 디디고서도 문학의 정체성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포스모더니즘이라는 뼈다귀를 울궈먹고 있으나 출판사 놈들의 책장사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도 않다. Ideo 좋아하다 할 말이 없는 철학도들은 어차피 철학이란 소크라테스 이래로 「知에 대한 반성의 역사」아니겠는가고 얼버무린다. 허 참,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창녀처럼 매도했던 기업 쪽에서 자기반성으로 몸부림친다. 창조력과 미래는 생존과 직결된다는 실제적인 역사발전론이 꿈틀거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면적으로 미래라는 세계와 결합하여 실질적인 창조를 주도해 나간다. 자 이 속에 시인 갈정웅(葛政雄), 그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지닌 보편성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 미래 속으로 끝없이 뿌리골무를 뻗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 부모님께서는 무고하십니까?"
"제가 다섯 살 때 복막염으로 돌아가셨지요, 17살에 시집 온 어머님은 당시 23살이었어요. 3남매 키우시느라 삯바느질로…."
아 우리 이럴 때 말없이 말없이 떨구는 거다. 눈시울 뜨겁다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는 거다. 훌륭하신 어머니. 장한 아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상실감을 딛고 그래 강원도 감자바위라는데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더란 말인가.
"중학교 2학년때이던가요. 시 써서 문교부 장관상 받았어요. 아마도 그 운명의 날 줄이 얽히어 시인이 됐나 봐요. 헌데 말이죠. 그때가 2~3년 전이던가요. 강릉의 후배녀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대만에 갔었는데 비행기 속에서 한국 분을 만났데요. 강릉 출신이라 했더니 갈정웅씨를 아느냐고 묻더래요. 안다고 했더니 만나고 싶다면서 중학교 때 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더래요. 거 참, 45세쯤 되는 기업체 부사장이시래요. 그때,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웠던지, 그때부터 전 시를 경건하고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시를 쓸 때는 목욕재계하듯이 새벽녘에 쓰지요."
시인은 덧붙여 시인이 된 내력을 일러주었다. 지금 문일고 교장으로 봉직하는 원영동(元永東) 시인이 그의 시를 들고 가서 시인데뷔를 시켰다는 거였다. 元詩人은 시인에게 있어서 부모님 같으신 스승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원서를 내 준 것도, 대학을 갈 때 국문과와 경제학으로 망설일 대에 경제학을 권한 것도 스승의 덕분이라 했다.
깊은 진리가 궤도 모양 나열한 여기는 조상들의 감화에 고개 숙여지는 곳 / 낭만적인 바이론도 고독했던 톨스토이도 이제는 모두 붓을 사리고 늘어앉았다 / 꾸중 들어 언짢을 때 / 버림받아 역겨울 때 / 언제나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도서실은 그리스도의 성스러움도 갖추고 있다 / 두툼한 한글사전이 아담한 서정시집을 거느리고 서가의 빈자리를 메꿔 갈 때 / 내 마음 여백에도 희열은 늘고 초점을 달리한 진리들은 형형의 이름을 안고 정열한다 / 수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의 깊은 진리가 칡넝쿨을 닮아 헝클어져 있는데 / 나약한 내 힘이 헝클어진 올올을 푸는 날 / 내 마음의 여백에는 또 하나의 태양이 뜬다.
- 갈정웅, <도서실>全文, 중 2때 문교부장관 수상작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갈정웅 시인이다. 사진을 굳이 올려 두는 까닭은 갈정운 시인은 대학의 총장이시고 기업체의 회장이지만 여전히 시인이시고 싶어한다고 여기고, 독서신문사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게 되었다. 몇 권의 시집도 낸 것을 알게 되었다.)
8살 때 화석정(花石亭)을 쓴 율곡(栗谷)처럼 시인은 까까머리 소년의 몸으로 詩 <도서실>을 썼다. 주목할 만이다. platon도 소년시절에는 시인을 열망했다던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보편성이라 하던가. 소년시인은 도서관의 상징, 기능, 특징, 목적 등의 류(類) 개념을 정확히 도출해낸다. 그것을 적절한 비유로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다사로운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다. 그뿐인가, 소년 시인은 도서관의 보편성을 서정적 자아의 내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고 자기 정체성을 완성이라는 통일체로 변용시켜 세계 속으로 내던지는 것이다.
"그게 중학교이던가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하는 영시 있죠, 그게 영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죠. 영어를 한문식으로 파자해야 하는가는 모르지만 Innisfree는 Inn is free로 되잖아요. 영어선생님께 여쭸더니 깜짝 놀라더군요. 영어선생 30년에 발견 못한 것을 갈(葛)군이 찾았느냐고…"
"제가 컴퓨터 1세대인 셈이죠, 허나 실망했어요. 컴퓨터는 단순반복이지 soft ware가 주가 되지 않았어요."
세상에, 컴퓨터의 soft를 단숨에 독파하다니, 시인은 마이다스(Midas)의 마법사인가.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황금으로 치환되어 버리는.
그렇다. 우리는 그에게서 황금의 정(精)으로 빚은 詩와 시집을 기대해 보자. 그의 시는 현대성과 일상성이라는 소재로만 채워져 있다. 시어 또한 그러하다. 서두의 <도로 공사장>은 70~80년대의 한국인이 미래의 젖줄을 빨기 위해서 어떻게 땀을 쏟았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아정체서의 형성과정 속에는 21C가 요약되고 21C에서 획득되는 보편성이 들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끝으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데뷔 후 14년이 지났으나 시집이 없다. 그래서 그의 시에 대한 졸평(猝評)은 뒤로 미룰 수밖에 도리가 없다. 덧붙여 글 빚으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을 갖는다.
그때는 필자도 미래의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아아, 길은 門 앞에서 절망하는데.
PS ; 사진은 인터넷에서 무단으로 발췌한 자료 사진이다.
후기 ; 갈정웅 시인은 심상사에 광고를 싣는 등으로 재정적 후원을 하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시단에 이보다 고마운 분이 있을까.
이참에 소개한다. 기업인으로서 시에 관심을 가졌던 분은 고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시다. 심상 시인학교에 꼭 왔다가셨다. 좋은 차가 없는지 현대의 갤로퍼를 타고서, 워낙 큰 키라서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였다. 덕분에 정주영의 자서전을 읽었다. 어린 시절 『통감』을 뗀 후에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였다. 『통감』 만만한 책이 아니다. 지금 한문학 전공자 중에 몇이나 읽었을까.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간 것은 한 편의 서사시 아니던가.
갈정웅 시인은 90년대 초에 개인 홈페이지를 갖고 있었다. 나의 평론을 오래토록 실어 두었었다. 그러나 나의 필화사건이 있자 지워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서운함이 교차되었으나 그저 그렇거니, 그리고 잊어버렸으나 이 글을 정리하면서 새삼 기억되어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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