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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중년의 단상 쉼 없는 세월에 밀려 어느덧 와 버린 중년의 자리 어느 날 문득 보았을 때 성큼 커 버린 아이들 거울 속의 나는 점점 원치 않는 형상으로 보이고 늘어나는 잔주름만큼 현실의 걱정도 늘어 나는 때 우리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어린 시절 여름밤 반짝이는 별 만큼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로 쏟아지는 밤하늘 별들을 헤며 머나먼 우주 저편의 별나라를 그리고 별 자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과 또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 이야기와 사랑하는 장미꽃을 위하여 독사에 물려 돌아간 어린 왕자와 마지막 성냥불을 밝히고 죽어간 소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메였었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린 어린 날의 천진한 소원들과 또 어른이 되면 하고 싶었던 수많은 계획과 바람들이 그저 철없던 시절의 꿈이란 걸 일깨워 주는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역할과 책임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슬픈 중년의 단상을 발견한다. 꿈과 현실의 괴리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 무엇을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너무도 왜소해서 그저 혼자 서글퍼 울 때 어딘가 한적한 바다로 여행이라도 떠나야 겠다. 그러나 여기서 일탈은 말아야지 담 밖의 봄의 환상에 우리의 삶을 던지기 보다 우리 자그만 울타리 안에 작은 불이라도 켜서 아직도 내 체온을 필요로 하는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이 되어야지 그리하여 해 질녁 황혼에 흰머리 마주 대고 곱씹을 따스한 추억을 만들어 가야지 언제고 내 삶이 끝나는날 내 보내신이 앞에 섰을 때 그래도 주신자리 지키다 왔노라고 겸손히 아뢰야지....(글 : 김성수) 어느 중년의 단상 김성수 쉼 없는 세월에 밀려 어느덧 와 버린 중년의 자리 어느 날 문득 보았을 때 성큼 커 버린 아이들 거울 속의 나는 점점 원치 않는 형상으로 보이고 늘어나는 주름만큼 현실의 걱정도 늘어나는 때 우리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어린 시절 여름밤 반짝이는 별 만큼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로 쏟아지는 밤하늘 별들을 헤며 머나먼 우주 저편의 별 나라를 그리고 별자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과 또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 이야기와 사랑하는 장미꽃을 위하여 독사에 물려 돌아간 어린왕자와 마지막 성냥불을 밝히고 죽어간 소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메였었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린 어린날의 천진한 소원들과 또 어른이 되면 하고싶었던 수많은 계획과 바람들이 그저 철없던 시절의 꿈이란걸 일깨워주는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역할과 책임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슬픈 중년의 단상을 발견한다. 꿈과 현실의 괴리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 무엇을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너무도 왜소해서 그저 혼자 서글퍼 울때 어딘가 한적한 바다로 여행이라도 떠나야 겠다. 그러나 여기서 일탈은 말아야지 담 밖의 봄의 환상에 우리의 삶을 던지기 보다 우리 자그만 울타리 안에 작은 불이라도 켜서 아직도 내 체온을 필요로하는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이 되어야지 그리하여 해질녁 황혼에 흰머리 마주 대고 곱씹을 따스한 추억을 만들어 가야지 언제고 내 삶이 끝나는 날 내 보내신이 앞에 섰을때 그래도 주신자리 지키다 왔노라고 겸손히 아뢰야지..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 김성수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오래된 골목 / 김성수 세상에 막힌 집은 없다 소통疏通할 수 있는 좁은 문이라도 있게 마련이다 낮은 담 너머로 서로 생활을 간섭해주는 이웃의 수다가 싱거운 일상에 간을 하고 때론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더라도 뒷날 평상에서 함께 마늘을 까며 간지러운 웃음으로 털어내는, 오래된 골목의 풍경은 조각조각 덧댄 상처를 땜질하는 소리로 저문다 사다리 타기를 하듯 막 그어 놓은 골목길 소꿉놀이하던 애들까지 다 불러들인 집들이 골목에 혓바닥 내민 불빛과 함께 환하고 관절염 앓는 대문의 삐걱거리는 통증을 걷어차며 취기로 용감해진 가장들이 귀가한다 가끔은 비행접시같이 그릇들이 날다 추락하며 들썩이는 집도 있지만 간지러운 귓밥을 파내듯 잠결에다 멍텅구리 배船 하나 띄워 놓는다 새벽이면 소화되지 못한 잠을 씻어내고 내장 같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기침 소리 외등 하나 날벌레에 밤새 시달려 축 쳐진 오래된 골목을 장막帳幕을 치듯이 안개가 덧칠을 한다 낡고 녹슬고 색 바랜 골목과 집들을 풍성하게 씻어내는 안개가 균열을 메우는 쓸만한 시작이다 하지만 고서古書의 어려운 한자를 대하 듯 오래된 골목은 알 수 없는 기호記號같이 아리송한 길이며 공간이었다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한천에서 비릿한 안개를 풀어낸다 비누 거품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무들과 적벽강에 서 있는 것 같은 영구 임대 아파트들이 안개에 푹 잠겨 공중 목욕탕 욕조 속의 노인처럼 흥얼거리는 시조 한 가락을 뽑는 듯한 풍경이다 정거장에 서는 버스마다 안개만 실어나르는, 한천로 4블럭에는 구멍난 양말을 꿰메는 어머니의 늘어난 메리야스같이 헐렁한 빈터에도 삐거덕거리는 그네 하나에 바람만 앉아 흔들리고 활기라는 단어를 텅텅거리며 가지고 노는 건 근처 전자공단의 젊은이들뿐이다 도로변 신문 가판대 뒷쪽에서 몇 사람이 바둑을 둔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세월에 수담을 하듯 찢어온 기보를 복기해 보며 살아온 삶도 복기를 하는 걸까 내내 손가락을 짚어가며 반상에 골몰해 있다 건너편 중년의 사내는 후절수를 두고선 사필즉생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고, 훈수하는 추임새 마다 바둑판을 달궈놓고 대마가 몰린 듯 궁색한 삶들이 불계를 꿈꾸고 있다 한천로가 머리띠를 두른 듯 노란 개나리꽃 늘어선 봄날도 가고 녹이 슨 오동잎 뒹구는 가을의 철문을 열고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의 청춘가는 구슬프고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서는 한천의 안개가 쨍하니 태양을 내놓듯이 자식들의 안부 전화라도 있을는지… 한천로 4블럭의 쓸쓸한 풍경을 지우고 싶은 마음을 정거장에 멈춰 선 버스에 태워 보낸다 다시 오수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로 내려앉는 한천로 4블럭 파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는 숨이 차고 빨대로 쭈욱 빠는 요구르트같이, 안개도 사위어가면 잘못 물린 틀니를 고쳐 끼우듯, 삐꺽거린 일상을 꽉 물고 나아가는 소리가 살아 있는 그 곳 저녁이면 뒤척이는 영구 임대 아파트의 불빛들이 한천에서 잠못들며 뒹굴고 그렇게 살아서 빛나고 옹관에 대하여 / 김성수 어릴 적 가난한 친구의 집에서 뒷간에 들어선 나는 큰 독을 파묻고 널빤지 두 장을 얹어 놓은 그 위에 앉아 균형을 잡으며 일을 본 기억이 있다 벽에는 벽지무늬 마냥 구더기들이 붙어 있고 독 아래에선 부글부글 발효되던 똥무더기 박물관 옹관 앞에서 엉뚱하게도 급하게 문기척을 하며 얼굴까지 샛노랗게 변하는 화장실 앞에서 처럼 뱃속이 싸하게 뒤틀린다 저 옹관 속에서 불쑥 손을 뻗으며 다리를 붙들 것 같은, 그래서 그 뒷간의 기억이 옹관 앞에 나를 세워 둔 것이다 어느 백제인의 주검이 태아같이 웅크린 채 자궁같은 옹관에서 썩고 허물어 졌으리라 임산부의 배같은 항아리의 넉넉한 곡선을 어루어 보다 배를 내밀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옹관의 균형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매점에서 잘룩한 허리에 주름치마를 입은 코카콜라를 들이키며 갑자기 풍만한 여자가 그리웠다 가난에 대한 사색 / 김성수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살아야 된다는 내 말을 끊으며 오살할 놈 배때기 고픈 것을 땅콩 까먹듯 까먹었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홀짝 홀짝 받아 마셨다 징하디 징하제 누렇게 뜬 달만 봐도 '배고파'를 노래하던 부황浮黃뜬 애들 얼굴 떠오르고, 보릿고개 시절에 죽을똥살똥 생똥싸는 게 옹이 같아서 신물 나도록 가난에 대한 적의를 가르치는, 목에 깁스를 해서라도 위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담화문은 가난에 대한 계엄령 같았다 애당초 내 뜻과 다르게 해석을 하는 어머니, 등 따숩고 배부른 아랫목으로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이셨다. 잎도 무성해서 편안한 휴식을 하는 여유로 새 몇 마리의 둥지가 되는 것이며, 큰 부자가 되자는 말이 아님을 안다 가난에 배불러도 헛헛한 그 때의 옹이가 아직도 지금의 편안함을 누르는 모양이다. 얼얼한 귀를 씻으러 밖으로 나와 아래로 내려보나 위를 올려보나 아찔하거나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니, 푸른 중심에 서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올려보는 밤하늘에 오늘 따라 오살나게 배부른 듯 별들이 기름기로 반지르르 하다.
어느 중년의 단상
김성수
쉼 없는 세월에 밀려
어느덧 와 버린 중년의 자리
어느 날 문득 보았을 때
성큼 커 버린 아이들
거울 속의 나는
점점 원치 않는 형상으로 보이고
늘어나는 주름만큼
현실의 걱정도 늘어나는 때
우리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어린 시절
여름밤 반짝이는 별 만큼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로
쏟아지는 밤하늘 별들을 헤며
머나먼 우주 저편의
별 나라를 그리고
별자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과
또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 이야기와
사랑하는 장미꽃을 위하여
독사에 물려 돌아간 어린왕자와
마지막 성냥불을 밝히고
죽어간 소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메였었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린
어린날의 천진한 소원들과
또 어른이 되면 하고싶었던
수많은 계획과 바람들이
그저 철없던 시절의
꿈이란걸 일깨워주는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역할과 책임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슬픈 중년의 단상을 발견한다.
꿈과 현실의 괴리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
무엇을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너무도 왜소해서
그저 혼자 서글퍼 울때
어딘가 한적한 바다로
여행이라도 떠나야 겠다.
그러나 여기서
일탈은 말아야지
담 밖의 봄의 환상에
우리의 삶을 던지기 보다
우리 자그만 울타리 안에
작은 불이라도 켜서
아직도 내 체온을 필요로하는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이 되어야지
그리하여 해질녁 황혼에
흰머리 마주 대고
곱씹을 따스한 추억을
만들어 가야지
언제고 내 삶이 끝나는 날
내 보내신이 앞에 섰을때
그래도 주신자리
지키다 왔노라고
겸손히 아뢰야지..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 김성수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오래된 골목 / 김성수
세상에 막힌 집은 없다 소통疏通할 수 있는 좁은 문이라도 있게 마련이다 낮은 담 너머로 서로 생활을 간섭해주는 이웃의 수다가 싱거운 일상에 간을 하고 때론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더라도 뒷날 평상에서 함께 마늘을 까며 간지러운 웃음으로 털어내는, 오래된 골목의 풍경은 조각조각 덧댄 상처를 땜질하는 소리로 저문다
사다리 타기를 하듯 막 그어 놓은 골목길 소꿉놀이하던 애들까지 다 불러들인 집들이 골목에 혓바닥 내민 불빛과 함께 환하고 관절염 앓는 대문의 삐걱거리는 통증을 걷어차며 취기로 용감해진 가장들이 귀가한다 가끔은 비행접시같이 그릇들이 날다 추락하며 들썩이는 집도 있지만 간지러운 귓밥을 파내듯 잠결에다 멍텅구리 배船 하나 띄워 놓는다
새벽이면 소화되지 못한 잠을 씻어내고 내장 같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기침 소리 외등 하나 날벌레에 밤새 시달려 축 쳐진 오래된 골목을 장막帳幕을 치듯이 안개가 덧칠을 한다 낡고 녹슬고 색 바랜 골목과 집들을 풍성하게 씻어내는 안개가 균열을 메우는 쓸만한 시작이다 하지만 고서古書의 어려운 한자를 대하 듯 오래된 골목은 알 수 없는 기호記號같이 아리송한 길이며 공간이었다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한천에서 비릿한 안개를 풀어낸다 비누 거품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무들과 적벽강에 서 있는 것 같은 영구 임대 아파트들이 안개에 푹 잠겨 공중 목욕탕 욕조 속의 노인처럼 흥얼거리는 시조 한 가락을 뽑는 듯한 풍경이다
정거장에 서는 버스마다 안개만 실어나르는, 한천로 4블럭에는 구멍난 양말을 꿰메는 어머니의 늘어난 메리야스같이 헐렁한 빈터에도 삐거덕거리는 그네 하나에 바람만 앉아 흔들리고 활기라는 단어를 텅텅거리며 가지고 노는 건 근처 전자공단의 젊은이들뿐이다
도로변 신문 가판대 뒷쪽에서 몇 사람이 바둑을 둔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세월에 수담을 하듯 찢어온 기보를 복기해 보며 살아온 삶도 복기를 하는 걸까 내내 손가락을 짚어가며 반상에 골몰해 있다 건너편 중년의 사내는 후절수를 두고선 사필즉생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고, 훈수하는 추임새 마다 바둑판을 달궈놓고 대마가 몰린 듯 궁색한 삶들이 불계를 꿈꾸고 있다
한천로가 머리띠를 두른 듯 노란 개나리꽃 늘어선 봄날도 가고 녹이 슨 오동잎 뒹구는 가을의 철문을 열고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의 청춘가는 구슬프고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서는 한천의 안개가 쨍하니 태양을 내놓듯이 자식들의 안부 전화라도 있을는지… 한천로 4블럭의 쓸쓸한 풍경을 지우고 싶은 마음을 정거장에 멈춰 선 버스에 태워 보낸다
다시 오수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로 내려앉는 한천로 4블럭 파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는 숨이 차고 빨대로 쭈욱 빠는 요구르트같이, 안개도 사위어가면 잘못 물린 틀니를 고쳐 끼우듯, 삐꺽거린 일상을 꽉 물고 나아가는 소리가 살아 있는 그 곳 저녁이면 뒤척이는 영구 임대 아파트의 불빛들이 한천에서 잠못들며 뒹굴고 그렇게 살아서 빛나고
옹관에 대하여 / 김성수
어릴 적 가난한 친구의 집에서 뒷간에 들어선 나는 큰 독을 파묻고 널빤지 두 장을 얹어 놓은 그 위에 앉아 균형을 잡으며 일을 본 기억이 있다 벽에는 벽지무늬 마냥 구더기들이 붙어 있고 독 아래에선 부글부글 발효되던 똥무더기 박물관 옹관 앞에서 엉뚱하게도 급하게 문기척을 하며 얼굴까지 샛노랗게 변하는 화장실 앞에서 처럼 뱃속이 싸하게 뒤틀린다 저 옹관 속에서 불쑥 손을 뻗으며 다리를 붙들 것 같은, 그래서 그 뒷간의 기억이 옹관 앞에 나를 세워 둔 것이다 어느 백제인의 주검이 태아같이 웅크린 채 자궁같은 옹관에서 썩고 허물어 졌으리라 임산부의 배같은 항아리의 넉넉한 곡선을 어루어 보다 배를 내밀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옹관의 균형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매점에서 잘룩한 허리에 주름치마를 입은 코카콜라를 들이키며 갑자기 풍만한 여자가 그리웠다
가난에 대한 사색 / 김성수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살아야 된다는 내 말을 끊으며 오살할 놈 배때기 고픈 것을 땅콩 까먹듯 까먹었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홀짝 홀짝 받아 마셨다 징하디 징하제 누렇게 뜬 달만 봐도 '배고파'를 노래하던 부황浮黃뜬 애들 얼굴 떠오르고, 보릿고개 시절에 죽을똥살똥 생똥싸는 게 옹이 같아서 신물 나도록 가난에 대한 적의를 가르치는, 목에 깁스를 해서라도 위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담화문은 가난에 대한 계엄령 같았다 애당초 내 뜻과 다르게 해석을 하는 어머니, 등 따숩고 배부른 아랫목으로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이셨다. 잎도 무성해서 편안한 휴식을 하는 여유로 새 몇 마리의 둥지가 되는 것이며, 큰 부자가 되자는 말이 아님을 안다 가난에 배불러도 헛헛한 그 때의 옹이가 아직도 지금의 편안함을 누르는 모양이다.
얼얼한 귀를 씻으러 밖으로 나와 아래로 내려보나 위를 올려보나 아찔하거나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니, 푸른 중심에 서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올려보는 밤하늘에 오늘 따라 오살나게 배부른 듯 별들이 기름기로 반지르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