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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시 몇 편 | 좋아 하는 시들..
    시가 있는 사랑방 2010. 9. 29. 09:25

    ‘꽃’ -이상국(1945~ )

     

    노래하면 몸이 아파
    그러한 그리움으로 한 서른 해 앓다 일어
    피는 꽃을 보면 눈물 나네
    노래로는 노래에 이르지 못해
    먼 강 푸른 기슭에서 만났다 헤어지던 바람은
    흐린 날 서쪽으로만 가고
    작고 작은 말을 타고 삶의 거리를 가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진
    나는 너무 많이 울었네
    한 서른 해 아픔으로도
    사랑 하나 깨우지 못하여
    그러한 그리움으로
    마당귀 피는 꽃을 보면 눈물나네

    --------------------------------------------------------------------------------
     
    첫 시집에 있는 시. 이때 이미 이상국은 다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 후 우리 삶은 나머지

    것인가. 꽃은 아픈 몸이다. 아프게 꽃피었던 시절이 있다. 그 거리의 작고 작은 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아직도 마당귀에서 피는 목마른 꽃이다.

    <고형렬·시인>
     

     
    2007.08.05 20:01 입력 / 2007.08.05 21:01 수정


    ‘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으로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


     인간의 몸을 각루자라고도 한다. 즉 오물이 쏟아져 나오는 포대다. 또 이 한 물건은 오묘해

    알 길이 없으니 ‘이 뭐꼬’만 남는다. 구두에 발이 들어간다. 젖은 구두는 발을 거부하다 끝내

    구두 주걱에 의해 발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인생이다. 던져진 존재. 다행히 젖은 구두는 힘껏

    발을 감싸준다.

    <고형렬·시인>
     

    ‘꽃은 시들고’ - 오세영(1942 - )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

    킬킬 웃는 옥잠화.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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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오세영시전집』두 권이 상자되었다. 시와 싸워온 시인들의 모습은 대체 초췌하다. 나는

     그 초췌함이 좋다. 그러니까 1965년 데뷔 이후 42년이 되었다. 내가 잠든 사이 꽃은 시들었을

    지언정 지진 않았다. 품에 안고 살아온 시의 꽃들. 분명 나의 꽃들이다. 지금 꽃은 금간 꽃병에서

    잠깬 나를 바라본다. 꽃과 나는 서로 자리끼를 찾는다. 평생 시의 꿈을 꾸다 왔다.

    <고형렬·시인>                                2007.07.11 21:39 입력 / 2007.07.12 14:46 수정 

     

    ‘향수병’ - 박민흠(1954~ )

     

    저 산은 날 부르고 달은 몸을 낮추고

    도시 비둘기는 저녁 휘장을 찢고

    센트럴 파크 뒷골목을 배회하는 깡패처럼

    비수 같은 봄은 젊기만 한데

    산골 귀제비처럼 어둠에 숨어

    나는 지독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

    파사(破寺)에 앉아 태워버릴

    불필요한 언어라도 붙잡고

    날 새도록 가슴 질러가며

    나를 꾸욱꾹 저미는

    밤의 공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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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제비는 비수처럼 날아간다. 한 시대와 추억을 관통하는 날개는 검고 가슴은 희다. 1970

    년대 서울의 겨울공화국을 떠난 지 30년. 뉴욕 센트럴 파크 뒷골목의 깡패처럼 황량한 미주

    의 봄에 얻은 병과 치유의 까마득한 세월. 명치 끝이 까맣게 탄 걸 산제비가 알까. 이제 지독

    한 향수와 싸워 온 시인의 심장을 보아야 할 판. 파사에 앉아 있는 한 나그네, 내면에서 들리

    는 밤의 공포탄이 선명하게 한 생애를 둘로 갈라놓는다.

    <고형렬·시인>                                 2007.07.06 19:33 입력 / 2007.07.06 23:34 수정 

     

     

    ‘아주 가까운 피안’ -황지우(1952~ )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照明)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어디선가 웬 수탁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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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농촌에서 한낮의 수탁 울음을 듣고 서산은 전율했다. 볏 같은 저 외침은 무슨 연고

    인가. ‘일성계(一聲鷄)’를 들으면 대장부는 할 일을 마친다 했다. 이 모든 게 꿈일까. 까마득

    한 기억의 한 티끌과 영원 저 바깥을 잇는 통섭의 시. 오후 5시의 조명은 아파트 벽면에 가

    로막혀 마음을 들킨다. 일생이던 육체의 환몽 속에 소년들은 지나간다. 이 잠시의 피안은

    황지우의 혈흔이다.

    <고형렬ㆍ시인>                                                              2007.06.25 20:06 입력 

     

     

    '뗏목'-신경림(1935~ )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

    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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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을 건네준 뗏목을 버려야 한다. 어떻게 생사를 함께한 것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는개를

    내다보며 쉬고 있는 저 깊은 희양산의 봉암사 저녁. 절방에서 생은 참 허허롭기만 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필요없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고형렬.시인

    출처 : 청랑 김은주가 머무는 사랑의 공간
    글쓴이 : 청랑 김은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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