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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얽힌 사연시가 있는 사랑방 2009. 7. 17. 15:39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중에 >
< 시인 박인환 >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美男 詩人 박인환(朴寅換)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고 합니다.
술집「銀星」에서 외상값 때문에 작사했다는 세월이 가면...
이 詩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9·28 수복 이후에 피란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朴寅煥 등을 비롯한 한 떼의 친구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폐허가 된 명동에도 하나 둘 술집이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나게 되었다.당시 탤런트 崔佛岩(최불암)의 모친은 銀星(은성)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도 않은 채 계속 술을 요구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했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성」 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작품이 완성되자 朴寅煥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李眞燮(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이 노래를 듣던 「은성」 주인은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 하였다.이 일화는 이른바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의 단편 「명동」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렇게"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 이란 시어을 발굴해 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있었던 그 날 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명동백작' 박인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만 30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죽어가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 가슴이 답답해"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더불어 죽기 며칠 전, 그가 외사랑한 벗, 시인 김수영을 찾아가 펜 한 자루(김수영이 '모나리자'에 술값 대신 맡긴
만년필)만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뒤돌아 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이 시는 구체적인 이미지 제시를 통하여 시인의 체험의 실체를 보여 주는 대신, '그 사람'이 떠나버린 아픔과 슬픈 자아의 모습이 전면에 나타남으로써 애상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띤다.
참담한 전쟁을 통해서 겪은 비운과 시대적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삶의 중압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체념과 무력감에 젖게 하며,그의 시는 쉽사리 감상에 빠지고 만다. '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가슴에 남은 추억을 읊조리며 방황하는 화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한다.
도시적 소재와 문명어를 통해 삶의 허무를 체념적 감상주의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유리창·가로등·공원·벤치' 등의 시어는 후반기 동인들의 시에도 흔히 발견되는 것인데, 박인환은 도시와 문명과 현실에서 시의 테마와 언어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神)을 상실한 시대, 삶의 지향성을 잃은 상황에서 화자 '나'는 가슴에 남은 옛 추억과 아름다운 환상만을 떠올리며 후미진 도심(都心) 밖 언저리를 거닐면서 허무에 젖어 보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연의 '서늘한'은 허무 의식과 상실의 슬픔이 비장감으로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박인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이 시의 화자 역시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지닌 채, 어두운 시대가 안겨 준 상실의 슬픔과 고뇌를 밟으면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박인환은 한때 모더니즘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적 감각과 높은 지성을 바탕으로 색다른 시를 써서 주목을 받던
재능 있는 시인이었다. 31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 시와 낭만과 술을 벗하며 끈질기게 현대 문명의 위기와 불안 의식을 우수에 찬 목소리로 노래하다 간 시인이다.
시적 자아는 1연에서 지난날 한때 사랑했던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조차 지금에 와선 생각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고 무거운 사랑은 아니었던 듯싶다.
가볍게 스쳐 간 사랑이라는 느낌이 짙다.
그렇지만, 그 눈동자와 입술은 생생하게 가슴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사랑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2연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다.
우리가 사랑을 맺은 곳은 저 가로등이 흐린 거리였지. 그 날도 아마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밤이었던가?
3연은 독자를 한층 더 감상적 분위기로 몰고 간다. 이제 그 사랑은 가고 추억만 남았다.
우리가 거닐던 공원, 그 벤치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 나뭇잎에 우리의 사랑도 묻히리라.
4연은 1연의 되풀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 '서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반복함으로써
옛 사랑의 따뜻함이 없는 현재의 심적 상태가 노출된다. 그 때문에 추억은 더욱 아름답고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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