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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트라우마'를 치유해준 수란(水卵)'흔해빠진 일반상식 2013. 9. 11. 11:41
[이유석의 음식공감] 그녀의 '달걀 트라우마'를 치유해준 수란(水卵)
"혹시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있나요?"
주문 전화가 왔다. 필자의 레스토랑 메뉴는 부적합 판정을 받을 만한 것들이었지만,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맞춰 드리는 것으로 절충이 이뤄졌다. 예약한 시간에 그녀가 왔다. 반듯한 쇼트커트와 세미 정장이 잘 어울리는 세련된 여성이었다.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일일이 물어본 그녀는 샐러드와 생선 요리를 시켰다.
채식주의자도 여러 단계로 나뉜다. 채소만 먹는 단계부터 생선은 허용하는 단계 등등. 그녀는 유제품과 생선을 먹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 듯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필자의 레스토랑에 찾아온 그녀에게 왜 채식을 시작했는지, 어떤 채식 메뉴를 먹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유제품을 먹는 채식주의자는 대개 달걀을 허락하는데, 그녀는 절대 달걀을 먹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거부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때, 본가가 어려워지면서 식비를 줄이려고 반년 넘게 달걀로 끼니를 때웠어요. 그 기억이 너무도 끔찍해 지금도 절대 안 먹어요."
달걀 특유의 생김새와 냄새가 그녀를 여전히 괴롭히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달걀이 싫은 것이 아니라 달걀과 함께했던 경험이 싫었던 것이다.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수란이다. 수란은 달걀을 반숙 정도로 익힌 것인데, 일반 달걀과 모양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아기 엉덩이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하며 맛도 훨씬 부드럽다. 뜨끈한 콩나물국밥에 오르는 달걀찜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버섯 볶은 것에 수란을 올리고 특유의 향이 사라지도록 향신료까지 얹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필자의 성의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었다. 필자의 요구대로 포크로 수란을 터뜨리자 아직 덜 익은 노른자가 선명한 노란빛 액체로 버섯 위에 흘러내렸다. 그것을 싹싹 비비자 계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버섯은 코팅된 것처럼 윤기로 반짝였다. 한입 맛본 그녀가 다행히 빙긋 웃었다.
"세월이 과거의 상처를 어느 정도 아물게 해주었나 봐요. 다행히 거부 반응이 안 일어나네요. 아직은 장담할 수 없지만, 계속 시도해볼게요."
'1인용 식탁'이라는 소설이 있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 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배경이며, 주인공은 혼자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을 줄 몰라 괴로운 사람이다. 학원에서 기술을 어느 정도 익혀 식당에 가는 것이 익숙해지자 학원을 그만둔 주인공은 첫 도전 앞에 망설이다 결국 깨닫는다. 그간 학원에서 익힌 기술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정으로 학원을 찾은 사람들과 함께 먹으며 잠시나마 위안을 삼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모든 시련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본인이 용기를 내는 것밖에 없으므로.수란 레시피
●재료(1인분 기준)
달걀 1개, 식초 1큰술(1인분)●조리법
1. 냄비에 물을 반가량 채우고 식초 1큰술을 넣는다.
2. 물이 살짝 끓기 시작하면, 달걀을 깨서 넣는다.
3. 수저로 달걀을 살살 공 굴리듯 돌려준다.
4. 2분 정도 끓는 물에 익힌 뒤 수저로 조심스럽게 꺼낸다.
5. 버섯 요리나 해산물 요리에 곁들이면 좋다.'흔해빠진 일반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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