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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길'의 지리학모르는세상얘기들 2012. 6. 4. 18:25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 카미노 네이버 카페를 들어갔다가,
'좋은소리'님께서 「전례음악」까페에서 까미노 순례기를 연재하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멋진 삶, 은혜스런 고백을 감동으로 대하게되었습니다.
실은 님께서 이 대장정을 준비하시는 중에 불초와는 우연히 만나 두어 번 걸은 경험이 있습니다.
많은 은혜 받고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도했는데,
과연 여기서 제 기도의 응답을, 귀로 보고 눈으로 듣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듬뿍 축하할 일입니다.
순례(巡禮)란 사서 하는 고생길 입니다.
헤아릴 길이 없는 신의 뜻을 믿고 내 집과 마을의 안전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가는 길이죠.
오직 길이 끝나는 곳, 성스런 그곳에 이르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믿음 하나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탐험과 영혼세탁의 이 길에서 미리내처럼 숱한 은헤와 감동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고행과 고백을 간증하는 님의 글에서 '선을 행하'시는 열정과 사랑을 읽습니다.
부디 천로역정, 영생을 만난 이 선물을 오래오래 간직하시기를.....
여러분이 참여하시는 광장에 개인적인 인연을 거론하여 송구합니다.
순례기에 덧글들에서,
'전례음악 까페' 회원님들도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많으시다는 걸 알게됩니다.
하여 님의 순례기에서 영양가 많은 정보를 소개하시지만,
이 불초의 부족한 까미노 여행기와 크리스쳔들의 유럽 순롓길 족보 및 역사를 소개할까 합니다.
한 이방인이 불쑥 나타나서 이 까페의 숭고한 사랑을 훼방하는 결례가 되지않을까 염려입니다.
까페 회원님, 좋은소리님,
부디 평소에 음악예술을 통한 복음 전파에 사랑 실천에 큰 영광 있으시기를 희망합니다.
좋은소리(우정50년)님과의 스치듯 인연을 기억하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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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간 길
세월은 이런 거군요.
벌써 4 년 전 이야기니까요.
프랑스와 스페인을 다녀왔더랬습니다.
시골로 시골로 75일 동안 매일 걸어서 1,800Km의 거리였습니다.
우리 릿수로는 4천 5백리 쯤 되는가 봅니다.
유럽에는 크리스쳔들, 주로 카톨릭의 3대 순례길이 있는데,
그 중에서 Spain의 북서쪽 끝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Santiago로 가는 길은 중세 때 부터 시작하여 무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길입니다.
지금은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졌자만 이 길의 원 이름은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로 가는 길'입니다.
이 성지의 정식 이름은 'Santiago de Compostela', 별이 빛나는 들판의 야고보'라는 뜻이죠.
이 도시 지명은 약칭으로 Santiago라 하고, 여기까지 오는 길을 스페인 안에서는 '까미노,Camino' 또는 유럽의 수많은 순례길과 구별하여 '프랑스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영어로 St James, 야고보는 예수님의 사촌이요 베드로의 친구면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여기를 끊임없이 걷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의 숨막히는 아름다움 말고도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전쟁 때 성자 야고보가 늘 지켜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800년이나 계속된 Spain의 국토회복운동이나 200년 동안의 십자군운동을 정신적으로 지탱해 주는 수호성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 전쟁은 바로 빼앗긴 국토나 성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순례지를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한 투쟁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고행을 통하여 지은 죄를 속죄하고 은혜를 받고자 순례로써 이 곳을 끊임없이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길을 이 방랑자 나도 한번 걸어보고 싶은데,
프랑스에 대한 길 정보를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에 마침 2년 전에 내가 가려고 하는 거길 다녀온 이를 찾았었죠.
그의 도움과 자상한 안내로 내 길이 한결 편안했습니다.
그는 제주도 사람으로 서울대 대학원을 나온 31살 연약한 처자 입니다.
허나 혼자서 세계 곳곳을 안가 본 데가 없는 나보다 한참 고수인 오리지날 나그네입니다.
그에게 감사 인사 겸 귀국보고(?)로 편지를 썼습니다.
나그네끼리의 정리로다 말입니다.
그의 메일 명은 "사람" 입니다.
사람아!! 양 세진씨!
요새 한국에 계시나요?
감사를 드릴려구요. 잘 다녀왔거든요.
사람아! 씨의 덕분으로 큰 탈 없이 돌아왔습니다.
르쀠,Le Puy에서 4월 15일부터 걷기 시작하여 피니스테레,Finisterre에 도착한 날이 6월 26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31일 동안 France를 끝내고 생쟝,Saint-Jean에 도착해서 국경 넘기 전에 기념으로 2일,
스페인의 한의사 제자가 똘레도,Toledo에서 부터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700여Km를 차로 날 데리러 왔르므로 그 제자집에 가서 10일, 그리고 Santiago에 도착해서 기념으로 2일,
그 외에는 75일 동안 단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 걸었습니다.
하루 평균 30Km 정도였습니다.
서울을 떠날 때 내 친구가 만들어 준 베드버그, 빈대약은 France에서 20일 만에 동이 나고
Finisterre의 알베르게 Paz에서 이틀 중 둘째 날에, 그러니까 이번 여정의 맨 마지막 날에 드디어 나도 그 놈들 공격을 받았는데 진짜 무섭고 지독한 놈들이더군요.
나는 양 팔목과 손바닥이였는데 눈을 당했다던 세진씨는 오죽했을까 싶었습니다.
다 끝내고 Santiago에 다시 되돌아와서 이틀 쉬는 중에
뒷골목에서 까미노를 걷고 막 도착한 옛날 문리대 선배와 한국 아가씨들 셋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중 한 아가씨가 눈물을 마구 글썽이면서 하는 말이,
"Santiago에 도착하면 뭐 대단한 것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그저 무덤덤해요"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까미노 라는 거대한 양파를 한 번 까본 것 같지 않습니까?"
France도 Spain도 땅 모양이 한국의 지형과는 달라서,
산 정상 이라고 믿고 기를 쓰고 언덕에 올라서면 저 멀리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고
저 언덕은 틀림없이 꼭대기로 그 위 파아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겠지,
그 다음은 내리막 일거야,
믿고 거길 숨차게 올라가면 또 다시 저멀리 지평선 같은 언덕이 켜켜이 펼쳐져 있고, 그렇게 양파를 까듯이 매일같이 까고 또 까고 계속 까들어가 보니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결국 어느덧 Santiago가 나왔으니까요.
양 세진씨,
San Marcos에 들어서기 직전에 내리막 길에서 드디어 Santiago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감격과 환희가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휩쓸려 오면서
내 눈에는 대책 없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에 들어서서도 대성당 앞에 다다를 때까지 4~50분 동안을 내내 울면서 걸었습니다.
내가 깐 양파는 그렇게 매웠습니다.
재삼재사 너무나 감사합니다.
맨 첫날 France의 Le Puy에서 새벽에 성당을 나와서
시내를 지나 가파른 언덕을 숨차게 올라 고원지대같은 평원을 4~50 분 걷는데,
배낭이 하도 무거워서 물 챙기고 간식 넣고 Miam Miam Do Do 책, 지도 등을 다 합하니 22~3Kg쯤 되었나 싶었습니다.
너무나 무거워서 '오늘 하루면 몰라도 두 달 이상을 매일 걸어야 하는데 이건 아니다.'
나는 그만 돌아섰습니다.
되돌아가서 우체국에서 짐 일부를 과감히 한국으로 보내야 겠다고......
그런데, 채 10분도 못가서 웬 사나이(알고보니 프랑스인 음악교수)가 오면서 불쑥 던지는 말이
"왜, 돌아가는 거요? 아까 성당에 출발미사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한 분이죠?"
"짐이 너무 무거워서 우체국에 가서 좀 부치고 내일 다시 출발 할련다." 했더니
그가 순간 내게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모르는가?! 까미노에서 절대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오직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해서 걷는 것 뿐이다.
왜 굳이 되돌아 가는가?
짐이 무거우면 다음 동네에서 우체국에 들어가라!
Go on! Go on! Walk on to Westward, to Westward!"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꼈습니다.
"그래! 이것이 바로 Camino의 철학 이구나!"
나는 다시 되돌아서서 걸었습니다.
그 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단 한번도 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매일같이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나 내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명함 한장도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 "천리길을 갈려거든 눈썹 하나라도 빼 놓고가라"는 말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왜? "배낭은 깃털처럼 가볍게"라고 선험자들이 그토록 충고했는지를 몸소 느꼈습니다.
어깨의 살이 파지고 두발의 뒤꿈치도 파지고 계속 핏물이 흘렀습니다.
허나 Spain에 들어오니 풍광도 길도 마치 친절한 가이드가 날 따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마다 만나는 새벽길 안개 낀 몽환의 대지,
지평선 벌판에서 하염없이 나를 따라오는 창파에 시달린 듯 형형색색 야생화,
가이없이 펼쳐진 침묵의 보리밭, 그 위를 스쳐가는 바람,
'어머니의 사랑처럼 뜨거운' 스페인의 그 태양,
아스라한 서쪽 하늘에 날마다 그려지는 보라빛 농염한 노을....
그 길,
Camino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마냥 그리웠습니다.
지평선에서 혼자 엉엉 울었다가 미친듯이 허허 웃었다가 또 노래도 외쳐 불렀다가 또 통곡의 기도를 올렸다가,
Camino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감사와 한 없는 은혜의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끝나기 두 주일 쯤 전부터는 계획하고 있던 단식을 결행했습니다.
쥬스 한 모금 안마시고 오직 소금과 물, 마그네슘만 먹고 걸었습니다.
딱 일주일, 150시간 동안이였습니다.
음식을 끊으니까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그 날 목적지에 도착해도 오늘도 해냈다! 라는 성취의 감동도 없고, 꿈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양념과 간이 다 빠진 싱거운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그저 무덤덤 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엄청 남았습니다,
그 바쁘던 빨래시간, 일기 쓸 시간, 생각할 시간이 널널하게 남았습니다.
시간도 생각도,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기 위하여 진정 바보 같이 살고있구나 싶었습니다.
허나 왜?!
사람들은 이 길을 그렇게 사랑하고 줄기차게 걸을까?
사람아!
나는 지형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의 지형을 눈여겨 보고 다녔습니다.
산 능선, 그 선의 흐름이 우리나라 산세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느릿느릿 부드러운 능선의 동선(動線)은 잘 그려낸 누드화의 관능적인 여체(女體)의 선과 흡사했습니다.
아하!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안기는 거로구나!
그러니까 엄마 품에 안기는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천년세월 동안이나 끊임없이 이 길을 사랑하고 있구나!
엄마 품에 안기므로
남녀노소 모두 다 이 길 위에서는 그렇게들 친절해지고 순진무구해지는 구나!
너 나 할것없이 모두 엄마의 천의무봉 아기가 되는거로구나!
그렇구나. 땅을 걷고는 있지만 사실은 내가 꼭 한번은 그래지고 싶은 깨끗한 마음,
사람들의 그 순수한 마음 속을 걷고 있는 거로구나 싶었습니다.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내 나라, 하늘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너무너무 힘든 어느 날 잠들기 전에 절대로 더는 계속해서 못 걷겠다,
낼은 한 사나흘 쉬었다 걷자 하다가도 날이 새면 나도 모르는 새
서쪽을 바라보며 빨려들어 가듯이 또 걷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산통으로 고생한 여인이
다음에는 절대로 아기를 안 가진다 하다가도 시간이 좀 지나면 그 고통은 까맣게 잊고
생명을 향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둘째도 셋째도 가지는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길은 나를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허나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향의 우리들 어머니 같았습니다.
어서오라는 성화를 부리진 않지만 거기서 내가 오기만을 늘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길은 고향의 그 어머니 같았습니다.
마지막 Finisterre의 Faro,
세진씨도 알고 있듯이 지리학적인 땅끝은 포르투갈 쪽에 따로 있지만 크리스쳔들은 여기를 땅 끝이라 하지 않습니까?
등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두달 보름 동안 그렇게도 많이 보아왔던
거리 표지석 기둥의 가리비 그림 아래는 제로 0Km가 적혀 있었습니다.
더 이상 걸어 갈 땅이 없었습니다.
하여 절벽 위에서 한 동안 대서양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나는 "Camino de Santiago"의 마지막 의식을 치루었습니다.
그것은 내 소지품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날 보려고 근처에 있던 순례자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시작해서 마지막 그 때까지 입고 있던 바지, 덧옷용 조끼, 속옷, 양말, 장갑을 태웠습니다.
얼굴로 땀이 자꾸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자 쓰기 전에 매일같이 눈썹 위 이마를
동여맺던 노랑 스카프는 등대 아래 철탑 중간에 묶어놓고 왔습니다.
아마 오늘도 거기서 대서양 바람에 나부끼고 있겠지요.
걷는 동안 알베르게 숙소마다 있던 방명록에 간혹 한 두어줄 글을 남길 때는
나는 늘 이렇게 썼습니다.
"Corea del Sur, 서울예고 河童"
그러나 철탑에 묶은 내 스카프에는 본명을 처음으로 썼습니다. "河童, 이 중길" 이라구요.
그리고 까만 싸인펜으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평선을 넘은 사람은 마을을 보았고 수평선을 넘은 사람은 世界를 보았다"
아침마다 출발할 때면 늘 내 그림자가 내 앞 길바닥에서 나를 인도 했습니다.
동쪽을 등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고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 쯤이면 그건 으례히 내 뒤에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나는 내 그림자를 밟고 지나갔습니다.
새옹지마라, 이 인생살이는 누구나 살다보면 빛도 그림자도 있을진대,
Camino 이 길은 우리네 인생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가는 길, 내 생의 그림자를 지우고 지나가는 길이였구나.
그래서 태웠습니다.
사람아!
"신은 독일인 에게 정신을 영국인 에게는 바다를 프랑스인 에게는 넓은 국토를 주었다." 했습니다.
오! 지평선! 동서남북 광대무변한 대지,
앞에 가는 사람이 다만 까아만 한 점으로 보이다가 개미로 변해가는 가이없는 프랑스의 고원지대에서, 또 스페인의 매마른 천지 라 만챠, 일망무제의 Meseta 평원에는 적막강산 밖에 없었습니다.
절대고독,
찢어지는 고독 그 자체 였습니다.
아아! 인간은 영혼이 해결 못하는 고독을 먹고 사는구나.
단 사랑이라는 반찬으로 믿음과 소망을 밑반찬으로 하여.
그래서 그 길은,
매순간이 은혜와 감사와 그리움의 명정(酩酊) 이였습니다.
그 장엄한 지평선이,
그 명미(明媚)한 풍광(風光)이,
내 고독을 핥고 지나치는 그 통쾌한 바람이.....
까미노의 풍광과 이 고독,
그 바람과 태양,
꽃과 나무와 풀내음 흙내음, 그 사람 냄새,
날이면 날마다 웨쳤던,
Hola!, Buen Camino! Buen Camino!!
그리고 벗이 되어 함께 걸은 그들과 세진씨,
모두를 사랑합니다.
- 프랑스의 GR 65와 스페인의 Camino를 다녀와서 감사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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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길'의 지리학
우리나라에서는 5~6 년 전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야기 입니다.
우선 길을 사랑하고 걷기를 사랑하는 분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일념에서 이 글을 씁니다.
하여 제 정보가 팩트와 많이 다르다든지 문맥상 부풀려진 교만이 있다면 널리 이해해주세요.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바로잡아주십시오.
멀고 먼
길이라 먼저는 스페인의 까미노 이야기,다음은 유럽 순례길의 계통과 역사 소개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잡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
그 안에 있는 스페인에 관해서 유럽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다」 혹은 「사하라 사막은 피레네 남쪽에서 부터」라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우선 전자는 나폴레옹이 한 말로 정치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말이고, 후자는 이베리아 반도의 자연조건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을 수 차례 침략을 했다가 실패를 하고 맙니다.
우리 속담엔가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는 식으로 그 나폴레옹이 프랑스와의 차별화를 목적으로 스페인을 폄훼하기 위해서 만든 말입니다.
왜? 스페인은 과연 유럽 본토와는 다른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은 긴 세월에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으니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고려의 건국보다 100년 앞서서 이슬람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고려가 멸망한 후에도 100 여년 더 길게, 그러니까 7~800년동안이나 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여 스페인 국토 곳곳에 이슬람 문화의 잔재가 물씬 스며있을 수 밖에요.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는 사뭇 다른 면이 허다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국의 스페인 여행자에게는 오히려 각별한 매력이지만 나폴레옹은 이점을 꼬집은 것이지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자리잡고 있는,
이베라아반도의 대부분은 지형상 내륙에 메세타고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해안을 제외하고 반도의 대부분이 건조한 기후로 매마른 지역입니다.
그곳이 메세타 고원입니다. 까미노는 그 북쪽 연변으로 지나가죠.
특히 농사와 만물이 왕성하게 성장해야 하는 여름 강수량이 부족해서 '사막'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후학에서는 연강수량이 500mm이하를 건조기후, 250mm 이하를 사막기후라 합니다.
그런데 중앙부 메세타의 연평균강수량은 500~300mm입니다. 여름에 까미노를 걸은 분은 알겠지만,「태양의 나라」스페인의 여름은 태양이 살을 후벼 파내는 듯 뜨겁고 건조하지 않던가요?
이베리아 반도가 사막 같다는 말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그래서 이 건조한 기후에서 옛부터 발달한 산업이 양 목축에 양모 생산이었습니다.
소는 물끼 많은 풀을 먹어야 하지만 양과 산양은 매마른 풀을 더 좋아합니다.
산업혁명으로 면직물이 대량생산 되기 전까지 스페인은 한때 전 유럽의 양모 공급지였습니다.
이 양모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세비야에서부터 '은의 길'을 통해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까지는 스페인 국부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양모는 이 메세타 고원의 특산품이었죠.
차제에 유럽의 목축업과 모직물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싶지만 화제가 요점에서 벗어날까봐 다음으로 미룹니다.
후에 저와 까미노에서나 우연히 만나면 길위에 이야기꺼리로 남겨두겠습니다.
다만 스페인의 목양형태를 이목이라하는데, 메세타 고원 속의 분지와 에스트레마두라, 무르시아, 안달루시아 지방의 버려진 땅 가운데 약 800Km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넓은 지역에서 살아있는 풀을 찾아서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옮겨다니면서 이동목축을 하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사육되는 양은 아프리카 북쪽 아틀라스 산맥의 모로코에서 들여온 메리노,Merino종으로, 이 메리노의 가죽은 ‘모로코 가죽’으로 불립니다.
특히 질이 좋아서 이태리의 고급 가죽 제품의 원단 공급원이기도 합니다.
까미노 길초에 부르고스를 기억하시나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수도였고 까미노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스페인의 ‘문화유산’인 부르고스 성당은,
무어인을 몰아낸 스페인의 영웅 엘 시드와 그의 아내 히메나가 같이 묻혀있다죠?.
한때 이곳 카스티야는 대륙 최고의 양모 생산지로서 메세타 고원의 상류 귀족층과 군인 계층뿐만 아니라 상인들, 특히 양모를 상품화한 부르고스의 상인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했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보면,
그의 마상천리 유랑길 무대가 바로 이 메세타의 라만챠인데,
어느 날 양치기들을 만나서 존재하지도 않는 애인 둘씨네아 공주의 미모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자랑하고 나니까 양치기들이 다시 공주의 가계를 물어볼 때,
자기 애인의 집안은 저 로마마의 귀족 가문에서부터 유럽 일대의 명문 부호 집안을 두루 열거하다가, 이 부르고스의 명문대가를 나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카스티야의 부르고스는 한때 스페인의 경제를 주름잡던 곳입니다.
그리고 까미노를 걷다 보면 메세타로부터 갈리시아 지방에 가까와지면서 지평선 넘어 북쪽으로 거대한 산맥이 달리고 있죠? 그 산맥이 칸타브리아 산맥입니다.
산맥의 뒷편 북쪽 언저리에 해안으로 난 길이 바로 '북쪽길'입니다.
사실은 이 칸타브리아는 피레네 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입니다. 말하자면 생장에서부터 까미노를 따라 달려온 산맥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사람의 주먹처럼 생겼는데, 북부 해안 지역을 동서로 달리는 이 산맥이 대서양으로 빠져들어가는 곳이 스페인의 북쪽 끝입니다. 해안이 90도로 만곡한 부분이죠.
그리고 그 근처의 약간 남쪽 해안에 산티아고의 피니스테레가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스페인 말로 배후지, 후미를 '리아스,Rias'라 합니다.
험준한 산맥이 갑자기 바다로 빠져들면 근처 해안선은 둘쑥날쑥 복잡해지고, 크고 작은 반도와 섬이 많아지겠죠?
산맥의 후미에 있는 '북쪽길'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원인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헌데 우리나라의 전라도 남서해안에 다도해를 '리아스식 해안'이라 부르죠?
지형학에서 이 리아스식 해안은 바로 스페인의 여기에서 탄생한 말입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와인은 신이 만들고 맥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까미노에서 저녁마다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로 제공하는 와인이 생각나십니까?
와인의 원재료가 포도인 만큼 포도는 농산물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는 농사로 생산됩니다.
모든 과일의 고유한 맛은 기본적으로 그 지역의 기후풍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죠?
우리나라의 사과와 배맛이 세계적인 이유도 바로 한반도의 특유한 풍토 때문입니다.
물론 농산물은 종류에 따라 각기 그 재배조건은 다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에서 포도 재배를 위한 조건이 어느 나라가 더 유리할까요?
기후적으로 스페인이 훨씬 유리합니다.
과일맛이란 일조시간과 기온의 일교차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요.
이런 연유로 스페인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더 맛있습니다.
스페인의 훌륭한 와인은 파울로 코엘료도 그의〈순례자〉에서 나바라의 밀밭과 함께 '리오하의 포도'를 칭송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프랑스 와인이 스페인의 와인을 압도하고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마켇팅 때문이죠. 프랑스 와인의 세계화는 영국 작품입니다.
프랑스 포도의 주산지, 그러니까 와인 생산지는 긴 세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대서양의 주인으로 부상하면서 식민지인 프랑스 와인을 세계에 알린 것입니다.
유럽에서 순례길을 걸을 때, 프랑스든 스페인이든 또 다른 나라든 간에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 때 꼭 서비스 와인이 올라옵니다.
하여 유럽의 와인은 순례길의 애타는 나그네에게는 큰 은혜 중에 하나입니다.
한편 크리스챤들의 유럽 순례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포르투갈길, 프랑스길, 파야바스길, 덴마크길, 폴란드길, 헝가리길, 브렌너길, 크로아티아길,이탈리아길 등등이 있습니다.
이 많은 길의 이름은 서술적인 표현으로 '산티아고 가는 길'로 부르면 무난할 것입니다.
허지만 이 순례길의 호칭이 나라마다 다르므로, 우선 길 이름부터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일전에 제 여행기의 '제네바에서' 편에서 약간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먼저 독일어권(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독일, 스위스 동부 등)에서는 '야콥스벡, JakobsWeg'으로 통합니다. 성자 '야고보의 길'이라는 뜻이겠죠.
그리고 불어권(스위스 중서부, 프랑스)에서는 '생 쟈크, St-Jacques' 또는 '콩포스텔, Compostelle'로 부릅니다. 생 샤크는 성자 야고보의 불어 발음이고, 콩포스텔은 불어의 'Les Chemins de Compostelle의 준 말입니다. 불어의 체민 드 콩포스텔은 스페인어의 Camino de Santiago와 같은 말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스위스의 베른의 동쪽, 독일어권 사람들은 무조건 '야콥스벡'이라 하고 불어권으로 들어오면 '콩포스텔'을 많이 씁니다.
물론 스페인에서는 다들 아시는 대로 '까미노, Camino' 혹은 '산티아고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로 부릅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여행자 안내센터 등에서 앞다투어 볼일을 보려면 현지말을 쉽게 쓰는 것이 의사전달에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랑스길'은 프랑스를 지나왔다는 뜻일텐데, 아마 스페인 안에 있는 다른 까미노들과 비교를 하기 위해서 쓰는 말일 것입니다.
프랑스로부터 피레네를 넘는 길은 전부 네 갈래입니다. 이 중에서, 세 갈래는 한 곳으로 모여서 생장에서 피레네를 넘고, 다른 한 갈래는 생장으로 오지 않고 남쪽 피레네를 넘어서 스페인으로 들어옵니다.
세 갈래의 길은 생장에서 하룻길 전에 있는 오스타바트,Ostabat와 바로 그 직전에 있는 생 팔레,St-Palais에서 다 합쳐집니다. 그러니까 세 길은 생장에 들어올 때는 하나의 길이 되어있습니다.
프랑스의 생장에서 합쳐지지 않고 남쪽 피레네를 넘어서 스페인에서 합쳐지는 길은, 이탈리아에서 온 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두 길은 유럽의 남해안 즉 지중해 연안으로 오다가 프랑스 마르세이유 근처의 아를,Arles에서 합류해서 하나가 되는데, 이 길은 계속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지나다가 생장으로 가지 않고, 남쪽 피레네를 넘에서 스페인의 Puente la Reina에 와서야 까미노와 합류합니다. 그러니까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는 이탈리아쪽에서 걸어온 순례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길은 이탈리아 안에서는 남쪽과 북쪽의 두 갈래지만 프랑스에 들어오마자 만나서 하나로 됩니다. 이 중에 북쪽 길은 밀라노 남쪽에서, 동유럽과 구유고슬라비아를 지나온 길과 합류해서 온 길이기도 합니다. 유럽에는 예루살렘에서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장대한 순례길이 두 갈래인데, 이 길이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상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리고 스페인 국내에서 출발하고 프랑스길에서 합쳐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올라온 길이 Logrono에서 합류하고, 또 다른 길은 남쪽 그라나다에서 온 길과, 세비야('은의 길')에서 온 길이 Astorga에서 프랑그길에 합류하거나, 합류하지 않고 하나로 되어 곧장 산티아고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올라오는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상이 유럽 전역에서 가리비로 상징되는 산티아고로 가는 모든 순례길의 계통입니다
이 모두가 이른바 '산티아고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 입니다.
카미노 카페 회원이면 다 아시는 일이지만 유럽에는 카톨릭의 역사적인 3대 순례길이 있습니다. 성분묘 교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가는 길, 그리고 이 까미노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서 스페인의 북서쪽 끝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중세 때부터 시작해서 무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이름 난 길입니다.
원 이름이 Santiago de Compostela, 이는 '별이 빛나는 들판의 야고보'이라는 뜻이죠.
야고보의 이름이기도 한 이 성지, 도시를 약칭으로 Santiago라 하고. 거기까지 가는 길을 Camino라 부르기도 합니다. 성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사촌이요 베드로의 친구면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였지요?
누가 시작했을까요?
한국에서는 이 길을 자꾸 '프랑스길'이라 부르는군요.
.
산티아고로 가는 유럽의 모든 순례길을 출발 지점을 기준으로 해서, 프랑스의 브레타뉴 반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탈리아 반도까지 다시 한 번 더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단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시작되는 길은 간단하므로 생략합니다.
① 프랑스, 몽쉘미셸, Mont St-Michel에서 출발
파리를 지나온 길과 Poitiers에서 만나는 길
② 벨기에, 브르게스, Bruges에서 출발
덴마크에서 오는 길이 파리 직전의 상리스,Senlis에서 만나서 파리, Paris를 지나온 길
③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Amsterdam에서 출발
벨기에서 오는 길과 만나서 파리를 지나는 길
④ 덴마크, 알후스, Arhus에서 출발
독일 함부르그를 지나 파리로 이어지는 길
⑤ 폴란드, 그다니스크, Gdansk에서 출발
독일 베르린을 지나고 룩셈부르그로 해서 프랑스의 베즐레,Velzelay로 해서 생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길은 파리를 지나지 않고 프랑스 국토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생장까지 갑니다.)
⑥ 폴란드, 크라쵸비, Cracovie에서 출발
체코 프라하를 지나고 독일 쉬투트가르트를 지나서 프랑스 리용에서 헝가리에서 오는 길과 만나서 르쀠로 오는 길
⑦ 헝가리, 부다페스트, Budapest에서 출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찰츠버그, 인스부르크, 스위스의 취리히, 베른. 로잔, 제네바에서 프랑스 리용을 지나 르쀠, Le-Puy로 오는 길
⑧ ⑦번 길이 잘츠버그에서 북쪽으로 돌아 뮌헨을 지나고 독일 남쪽을 지나서 프랑스 리용에서 다시 합류하는 길
⑨ 이탈리아 브린디시, Brindisi에서 출발
이태리의 두 갈래 길 중에서 북쪽 길로서 아드리아해를 따라 북상해서 볼로냐를 지나고 밀라노 남쪽으로 해서 프랑스 남쪽 아를, Arles에서 로마에서 온 길과 합류해서 피레네 남쪽을 넘어서 스페인으로 들어가는 길 (그런데 이 길은 예루살렘, 이스탄불, 불가리아의 소피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이탈리아 베니스를 지나와서 밀라노 남쪽에서 북쪽 길과 합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⑩ 이탈리아 나폴리, Naples에서 출발
이탈리아의 남쪽 길로서 로마와 피렌체를 지나고 제노아를 거쳐서 프랑스 Arles에서 이태리 북쪽으로부터 온 길과 합류하는 길
⑪ 알프스를 넘는 산길(Brenner길)
⑦ 번 길의 잘츠버그 ↔ 인스부르크 ↔ 이태리의 파르모(이탈리아 북쪽의 ⑨번 길과 연결됨)
☞ 굵은 글씨에 밑줄 친 도시는 프랑스 안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네 군데의 출발 포인트임.
그러니까 스페인 밖에서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순례길은 모두 열한 갈래가 되는 셈이지요?
⑦ 번 길이 도중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알프스 산길도 있고, 또 동유럽에서 온 길이 이태리에서 합쳐지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 길 중에서 어떤 길이 가장 중요한 원조격 순례길이겠습니까?
바로 ⑦ 번길입니다.
예루살렘길은 종려나무(Plam Tree)로 상징되지만 이길은 가리비 마크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른바 프랑스 '르쀠에서 출발한다'는 길, '프랑스길'로 불리는 대표적인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즉 헝가리 부다페스트로부터 오는 길인데,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지나 프랑스를 동서로 관통하고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입니다.
물론 이 길은 예루살렘~이스탄불~동유럽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유럽 지도를 펼져놓고 보면 이해가 더 쉽겠지만
이 길은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를 아우르고, 실제로 프랑스 안에 네 출발점 중에서 순례자가 가장 많이 모이는 Le-Puy를 통과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프랑스 전 국토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장거리 워킹루트 중에서,「GR65」라 합니다. GR은 그랑드랑도네,Grande Randonee의 이니셜입니다.
여기서 아무래도 기독교에 관련된 유럽의 역사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크레타 문명과 에게 문명은 동 지중해에서 태동해서 위대한 인류 문명의 장을 열었습니다.
기원 전에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를 뒤 늦게 발흥한 로마인들이 차지하게 되고, 지중해는 곧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바다, Mare Nostrum’가 되었습니다.
기원 후 3~4세기 사이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후에 곧이어 동.서 로마로 분리되면서, 5세기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위대한 로마 제국의 서로마는 역사의 장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동로마는 지금의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풀에서 그 명맥을 유지합니다.
한때 동로마는 위대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도 했었죠. 그러나 기원 후 7 세기 경에 동로마의 지근 거리에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한 모퉁이에서 이슬람이 창건되어 파죽지세로 발흥합니다.
이슬람들은 오리엔트 세계를 순식간에 병탄하고, 뒤이어 놀라운 속도로 동서남북에 걸쳐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동남쪽으로는 '바닷길' 로 동남아시아까지 동북쪽으로는 '초원길' 과 '비단길'로 중앙아시아까지, 또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뒤덮고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까지 이슬람의 광포한 전사들이 낫 휘둘림으로 휩쓸고 지나가면, 낙타 등에 짐을 실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 뒤를 따랐죠.
로마인들이 우리의 바다라 불렀던 지중해 역시 순식간에 육지의 변화를 뒤따랐습니다.
기독교의 바다가 어느덧 이슬람의 바다로 변한 것입니다.
이슬람의 꿈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 대륙의 육지 안에서도 동쪽과 서쪽의 양 방향에서 기독교를 압박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이슬람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유럽 본토는 기독교 문화를 고스란히 지켰습니다.
그렇게 된 연유는,
대륙의 서쪽에서는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운동과 피레네 산맥이었습니다.
대륙의 동쪽에서는 비잔틴 제국과 터키의 토로스 산맥이었습니다.
산맥이라는 이 두 자연장벽이 이슬람의 끈질긴 정복의지를 꺽고 또한 막아준 것입니다.
오랜 세월에 산맥을 넘어왔다가 쫓겨가고 다시 넘어왔다가 쫓겨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서쪽 스페인에서는 700 년 동안의 레콩키스타, 즉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카스티야.아라곤.레온 왕국이 합병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때마침 신대륙의 발견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은 북아프리카로 패주를 하고 맙니다.
한편 동부 유럽에서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이슬람을 막아내다가 소아시아(터키 일대)에서 발흥한 강력한 이슬람 세력,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14 세기에 드디어 정복당합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오스만 터키는, 동유럽 일대까지 정복하여 이슬람화 시키고, 한때 신성로마 제국의 수도 비엔나까지 위태롭게 만듭니다.
소아시아 반도쪽에 오리엔트와 발칸 반도 일대의 동유럽이 이슬람 천지가 된것이지요.
그 결과 터키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라는데서 보듯이, 동유럽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혼재하여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유럽의 화약고'라는 발칸 반도에서 발생한 '인종청소' 등의 비극은 결국 동유럽에서 난마처럼 얽힌 민족과 종교의 갈등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여 그 민족 구성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유럽 대륙이 장구한 세월에 기독교 문화를 유지해 왔다는 것은 인류사와 평화라는 명제에서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례길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운동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하여 크리스쳔들의 순례길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우선 십자군 전쟁은 유럽 중세사에서 '신앙과 욕망의 협주곡'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전쟁 원인은 무슬림에 대한 응징도 성지 탈환도 탈환이지만 서로마 교황과 비잔틴 동방 정교회와의 애매한 힘겨루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키에프 공국 즉 현재의 러시아가 기독교의 동방정교를 국교로 선언하면서 비잔틴이 힘이 잔뜩 실린 데서 서로마 교황을 향한 야심을 억제할 수 없었죠.
십자군 운동 혹은 십자군 전쟁은 서기 1,000년 중반에 시작해서 1,200년 후반까지 8차에 걸쳐서 무려 250년이나 계속되면서 유럽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역사가 중세에서 근세로 진입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비해서 훨씬 선진 문화였던 이슬람 문화가 서서히 혹은 빠르게 유럽으로 전파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늘 그 승패와 관계 없이 문화 교류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하여 이 사건 이후에 유럽 대륙은 일종의 문화충격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오늘날 세계에서 통용되는 아라비아 숫가 이슬람 문화였고 또 유럽의 언어, 특히 영어에서 아라비아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수 많은 수학, 과학, 의학용어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십자군 이후에 동서 무역이 재개되고 유럽 내에 상업활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부의 축적에 따라 15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문예부흥, 르네상스가 일어나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한 학문과 기술의 발전으로 그 200 여년 후에 결국 산업혁명으로까지 이어졌죠. 실로 세계사의 놀라운 변화, 발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종교적으로는,
십자군 전쟁 이후의 세계사는 종교 간의 적대감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초에 기독교와 유태교와 이슬람은 그 뿌리가 같습니다.
이 세 종교의 경전은 다같이 구약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십자군 이전까지는 이슬람과 기독교는 어느 정도 공생 혹은 우호관계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적대감을 갖게 된 원인이라면
어느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서만은 아니겠지만, 1차 십자군 파견 때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는 명분 아래 그 당시 예루살렘 주민 5만 명 중에서 4만 명을 살륙했으니까 이를 어찌 성전(聖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슬람의 성전을 '지하드'라하지요?
무술림들은 이 지하드를 통해서 단시간에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정복후에 인두세와 정치적 승복의 조건으로 이교도의 존재와 지위를 존중했습니다.
헌데 십자군 원정대는 정복된 무슬림들에게 '개종 아니면 죽음'의 양자택일을 강요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서 "십자군은 곧 하나님의 기쁨"이란 말로 이슬람 토벌을 부추킨데서 출발한 십자군 운동은 엉뚱하게도 이런 과정을 거치기도했습니다.
아무튼 마호메트에 의해서 창시된 이슬람으로 인하여 크리스쳔의 영원한 성지,
성분묘교회가 있는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로도 변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오는 유럽에서 예루살렘을 가는 길은 큰 강 위에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모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1 번, '터키 행진곡'을 아시나요?
이 곡은 터키의 메헤테르 군악대의 행진곡 리듬입니다. 18 세기에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적에게 오스만 군대가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공포의 신호였습니다.
이 군악대가 소속된 오스만의 예니체리부대는 이슬람이 정복한 동유럽 일대의 기독교 가정에서, 사내 아이가 출생하자마자 바로 뺏어다가 이슬람식 영재교육을 시켜서 길러낸 강력한 군대조직이었습니다.
크리스쳔들의 성지 순례가 활성화 되기 시작한 것을 중세, 서기 1,000 년경으로 보는데, 이는 시기적으로 십자군 전쟁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리고 순례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15 세기 르네상스 시기구요.
바로 이 무렵에 지중해 역시 레판토 해전을 전환점으로 해서 근 700년동안 이슬람의 바다였다가 다시 기독교의 바다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국토회복 운동과 십자군 때에 유럽인들은 기독교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로 야고보 성자를 추앙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쳔들의 세 순례길 중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에 가장 많은 사람이 걷고 있는 연유라 볼 수 있습니다.
시시각각 고난과 위험에 노출되는 하염없는 순례길,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산티아고 가는 길을 한 번이라도 걸은 분들은 다들 압니다.
그때 그 길 위에서는 나도 어린아이 같은 천사였다는 것을.....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내나라, 하늘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우뚝 섰지요?
우리 국가브렌드의 상향과 관광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경사 중에 경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헌데 유럽 순례길의 매력은 신앙적인 의도 의미지만 일단 아름답습니다. 이 길을 개척한 선조들의 안목이 길의 아름다움에 촛점을 맞춘듯도 합니다.
여러분, 스페인의 까미노가 페미닌적 아름다움이라면 유럽의 머나먼 이 순례길은 매스큘린적 마초이즘입니다. 또한 다이나믹하고 웅대합니다. 그리고 고독합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스런 길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유럽의 아홉 갈래의 순례길 중에서 ⑦ 번 길,
헝가리,부다페스트 → 오스트리아,비엔나 → 린츠 → 잘츠버그 → 인스부르크 → 스위스,취리히 → 루체른 → 베른 → 로잔 → 제네바 → 프랑스,르쀠 → 생장 → 스페인,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순례길의 거리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선 스페인의 까미노를 걸은 분들은 이 길의 끄트머리에 불과 1/4 정도 밖에 걷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길의 전체 거리는 3천 4~500km입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까미노는 800여 킬로미터죠? 그러니까 전체 거리의 사분의 일쯤이지요.
물론 산티아고 가는 길은 레이스가 아닌 터에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멀든 가깝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걸으면서 얻는 감동과 은혜의 밀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을 만나는 영적 단련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카미노카페의 회원 수는 1만 7천 명을 넘어섰죠?
이분들이 다 까미노를 걸었거나 걸을 꿈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저는 환갑 해에 기념으로 해남 땅끝에서부터 휴전선까지 혼자 16일 동안 국토종단을 했습니다. 650km의 거리더군요. 허나 스페인의 까미노는 800km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토종단을 한 사람이 많을까요? 까미노를 완주한 사람들이 많을까요?
까미노 완주자가 월등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 국토종단의 시작은 집앞에서 해남까지 버스로 이동하면 되지만, 까미노는 일단 비행기로 유럽에 들어가야 합니다.
국토종단 때 전라도 노령 고개를 넘는데 차 말고는 아무도 없고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까미노를 며칠 걷다보면 한국인을 쉽게 만납니다. 참 많은 한국인 걷고 있지 않던가요?
이게 다 우리의 꿈 때문입니다.
까미노를 이미 걸은 여러분은 다들 이웃집 가듯이 거길 쉽게 갔습니까?
다들 어려운 가운데서 몸 만들고 비용과 시간 만들고 해서 다녀오셨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모두 다 당당히 이루어낸 것입니다.
꿈이란 우리에게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당초에 그 꿈을 어디에다 두느냐는 것이겠지만요.
2002 서울 월드컵 때 우리 '붉은 악마'의 응원 슬로건은 「꿈은 이루어 진다」였습니다.
오래 전에 힌슬로 목사라는 분도 꿈의 금언 같은 말을 했죠?
「당신은 가고자 하는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꿈 이상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꿈은 희망과 동의어일 때가 많고, '희망은 운명을 이긴다.' 했습니다.
3,500 킬로미터가 멀어보이십니까?
그래서 유럽의 크리스쳔들은 까미노를 단 번에 걷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휴가나 틈이 나면 와서 이어서 걷습니다.
우리에게 유럽 항공료는 부담이 적지 않습니다. 해서 저는 유럽여행 두세 번 중에 한 번은 마일리지로 다닙니다. 요새는 항공 마일리지 혜택은 곳곳에 많으니까요.
어떠신가요?
유럽의 굉장한 길, 꿈을 거기에다 두시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끝까지 다 걸어 볼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런 제 이야기에 부족하고 과한 부분은,
한 방랑자의 사랑, 저의 걷기사랑 길사랑 때문이라고 치부해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서울예고... "河童, 이 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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