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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송시 100편 - 제5편] 김춘수 ‘꽃’
    현대애송시 100선 2008. 1. 12. 14:20
    [애송시 100편 - 제5편] 김춘수 ‘꽃’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 [5]
    정끝별·시인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일러스트=권신아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입력 : 2008.01.0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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