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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노래 15탄 (아니벌써/산울림 1977)세상을 바꾼 노래 2011. 10. 17. 10:12추천 212011.10.13
(아니벌써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산울림 '아니 벌써' (1977)
산울림의 작은 걸음을 음악사의 거대한 도약으로 승화시킨 촉매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벼락과 같았다. 성음사(省音社) 사무실 문을 두드린 "가벼운 녹크 소리와 함께" 시작된 산울림의 역사는 1977년 12월 15일 발표한 데뷔 앨범을 통해 단숨에 거대한 음악사적 메아리가 되어 공명하기 시작했다. [산울림 제1집]의 타이틀 곡이자 오프닝 트랙인 '아니 벌써'는 산울림의 탄생을 알리는 축포였으며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산울림은 요컨대, 당대 우리 음악계의 결절점이었다. '대마초 파동' 및 '가요정화운동'의 여파가 초래한 뮤지션 부재의 하향곡선과 대학 캠퍼스로부터 쏟아져 나온 '그룹사운드' 융성의 상승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융합반응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의에 의한 음악적 세대교체의 압박이 독자적으로 자생한 음악적 돌연변이의 혁신으로 이어지는 파란을 낳은 셈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산울림을 동시대의 전형적인 캠퍼스 밴드로 분류하기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형제들로 구성된 밴드의 특성상 종합대별 혹은 단과대별로 계통을 이루고 있던 당시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일반적 존립방식과 달랐고,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축제나 모임에 서지도 않았으며 다른 밴드들이 흔히 그랬듯 외국 곡을 카피하여 관객과 조응하려고 애쓴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예선에 출전했고(당시에는 '무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다), 삼형제의 둘째인 김창훈이 서울대 농대 캠퍼스 밴드 샌드 페블즈의 멤버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산울림의 등장이 대학가 그룹사운드 전성기의 서막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오히려 주목할 것은, 그처럼 특이한 입지가 산울림의 독보적인 개성을 뒷받침한 조건이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산울림은 삼형제가 방구석에서 벌인 '음악놀이'를 통해 스스로 창작의 요건을 습득했다. 악기를 처음 잡은 순간부터 남의 음악을 모방하기보다 나의 음악을 창조하는 일에 몰두했던 비범한 재능과 무모한 시도가 산울림의 비할 데 없이 새롭고 신선하고 독창적인 노래들로 귀결했던 것이다. 데뷔 앨범을 녹음하기 전에 이미 100여 곡을 만들어둔 상태였다는 김창완의 증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산울림의 초기작에 수록된 노래들은 즐거움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가요들과 차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로큰롤의 원초적인 분방함이 혁명을 잉태했던 것처럼, 산울림의 생래적 자유로움이 파격을 낳았던 것이다.'아니 벌써'의 성공은 그처럼 발랄한 도발을 세상에 알리는 기폭제로 역할 했다는 측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잔뜩 일그러진 퍼즈 톤의 기타와 동요처럼 해맑은 멜로디의 보컬이 공존하고, 들썩거리는 부기 리듬과 콩닥거리는 오르간 선율이 동거하는 이 노래의 기묘한 매력은 첫 소절의 "아니 벌써"라는 노랫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 이미 벌써 모든 것을 결정짓고 만다. 그것을 통해 산울림은 일거에 기성 가요계의 관습을 깨고 당대 음악계의 진공상태를 해소한 기린아로 우뚝 섰던 것이다. 게다가, 돌이켜보건대, 당시 우리나라의 음악적 여건에서 비롯한 불가항력적인 변수가 이 노래(와 이 노래를 수록한 앨범)의 유례없는 독특함에 일조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가 BBC에서 레코딩을 했다면 아주 다른 소리가 나왔을 것"이라고 했던 김창완의 말마따나, 만 원짜리 중고 기타와 싸구려 국산 이펙터와 변변찮은 2트랙 레코더가 주조해낸 사운드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리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니 벌써'는 산울림의 작은 걸음을 음악사의 거대한 도약으로 승화시킨 촉매였다. 신중현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록의 역사는 그렇게, 가장 엄혹했던 시대의 공기를 뚫고 나온 산울림을 통해 극적으로 부활했다.100비트박은석 (100비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대중음악 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괴리에 와신상담(만)하고 있는 게 벌써 18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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