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함(澹泊) - 허필
澹泊貧家事(담박빈가사)
담백함은 가난뱅이가 살아가는 법
無燈待月明(무등대월명)
등불 없어 달 뜨기만 기다린다
折花難割愛(절화난할애)
꽃을 꺾자니 사랑스러운 것을 어떻게 없애고
芟草忍傷生(삼초인상생)
풀을 베자니 산 것을 차마 해치랴
白髮應吾有(백발응오유)
백발은 당연히 내 차지고
靑山復孰爭(청산부숙쟁)
청산은 어느 누가 욕심을 낼까
狂歌當歲暮(광가당세모)
미친 노래 부르다가 한 해도 저무나니
秋氣劍崢嶸(추기검쟁영)
가을의 기운 검처럼 서슬 퍼렇다
허필(許?, 1709∼1768)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호는 연객(煙客)·초선(草禪)·구도(舊濤)이며, 자는 여정(汝正)이다. 그는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평생 곤궁하게 살다간 허필(許佖)은 어느 날 그가 당당하게 가난을 고백했다. 담백함이야말로 가난한 자가 가진 고귀한 재산이라는 것이다. 가난을 담백함이라고 표현하니 멋지다. 어둠을 밝힐 등불이 없는 자는 달이 뜨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무소유(無所有)니 살아가는 것이 하나같이 자연스럽다.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가난하니까 덤으로 얻는 것도 많다. 가난하기에 꽃가지 하나 함부로 꺾지 않고 풀포기 하나 해치지 못한다. 그뿐 아니다. 남들이 소유하기 싫어하는 것은 온통 내 차지다.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백발도 내 차지고, 모두 살기 좋은 명리(名利)의 도시 서울로 몰려드느라 내팽개쳐 버려둔 푸른 산 역시 내 차지다. 사람들이 버렸다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것 없다고 비웃지 마라! 나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담백하다.

사진 / Blue G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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