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사랑방

[스크랩] [펌글]우수 동시 해설

여성국장 2012. 11. 20. 15:49

 

우수 동시와 우수 시를 싣고 해설을 붙였습니다.



신현득 윤부현 이준관 박두순 윤동주 정두리 손동연 제해만 문삼석 윤석중 강소천 신형건 김종상 김구연 박찬중 정지용 서재환 박목월 권정생 공재동 권태응 유경환 하청호 이문구 이정석 한석윤 박신식 이상현 김원석 권영상 헨리 뉴볼트 박 일 김 현 유희윤 박경용 박경종 서정슬 윤복진 엄기원 한인현 이정환 김종길 임금산 노원호 바스코 포파 김일로 이원수 최계락 이창근 정호승 박지현 김달진 최춘해 정현종 이시영 조정권 이성복 오선홍 김종삼 조태일 박형준 최문자 김영석 이성선 최승호 이재무 송찬호 정일근 이선영 심호택 문인수 나태주 김춘수 장석남 백 석 김광규 도광의 이홍섭 김형영 강현국 강은교 오규원 박해석 이호우 윤제림 황동규 오세영 정인섭 이경림 정진규 문정희 김수복 고재종 이수익 복효근 정끝별 송종규 고두현 허형만 김종철 이산하 감태준 황인숙 김명인 허수경 정완영 송수권 정운모 김수영 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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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득]


      문구멍


빠꼼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키가
큰다.

<해설>
올해로 시력 40년을 맞은 아동문학가 신현득 (1933년생) 시인의 동시입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가작 입상작이지요. 투고 당시 시인은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투고자 이름을 '상주국민학교 신현득'이라고 써서 심사위원 윤석중 선생이 어쩌면 국민학교 학생이 쓴 시일 수고 있겠다 싶어 차마 당선작으로 뽑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듬해 같은 신춘문예에 '산'이라는 동시로 당선하게 됩니다.
'아가 키가'자란다는 사실을, 문구멍으로 남을 엿보곤 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생생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군요.  ---2000년 5월 1일 소설가 박덕규 씀

 


[윤부현]


  달걀


껄쭉껄쭉한
새 도화지

예쁘게
말아 논
그 안에는

푸른 바다가
하나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

<해설>
질솔한 표현법과 선명한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여 온 윤부현 (1927-1986)의 동시입니다. 1960년대 한국 동시가 한창 시적 언어 조형을 모색할 즈음에 얻은 산물이지요. 달걀의 껍데기에서 도화지의 '껄쭉껄쭉한' 표면을 유추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달걀 속과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연상 앞에서는 모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 한 번 달걀을 흔들어 보세요, 바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달걀은 어쩌면 우리 식탁 위에서 푸른 바다처럼 살아 움직이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은 이렇듯 형상과 관념의 조화를 통해 무의미하게 보이던 하나의 사물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성을 찾아낸답니다.         ---2000년 5월 2일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씀

 

 


[이준관]


떨어진 단추 하나


해질 무렵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떨어진 단추 하나를 보았지.
그래, 그래, 우리는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단추 하나 떨어뜨리지.
그래, 그래, 우리는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서쪽 하늘에 깜빡,
해를 하나 떨어뜨리지.


<해설>
일반 시단에서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이준관(1948- )시인의 동시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 없이 노는 일에 빠져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네요. 그렇게 놀다 보면 옷에서 단추 하나가 떨어진 걸 알기 어렵고, 언제 그렇게 해질 시간이 되었는지 뒤늦게 알고 놀라곤 하지요. '놀다가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를 매개로 해서 "서쪽 하늘에 깜빡, 해를 떨어뜨렸다는 역설적 진술을 이끌어내면서 동심의 한 부분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0. 5. 3 소설가 박덕규 씀

 

 


[박두순]



새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노래를 한다.
지구 한 귀퉁이가 귀기울인다.

새떼가
하늘을 날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반짝인다.


<해설>
키와 몸집이 작은 시인 박두순(1950- ) 만큼 작고 하찮은 것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의 모습과 닮은 이름 모를 풀꽃이나 새들을 더없이 좋아하는 시인이지요. 그래서 그는 작은 새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커다란 지구의 한 귀퉁이를 느낄 수 있지요. 하늘을 가르는 새떼의 하찮은 날갯짓 사이로 얼핏 비쳐드는 하늘 한 귀퉁이의 반짝거림도 볼 수 있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보다 더 보잘 것 없는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 이상으로 훌륭하게 우주의 섭리를 수행하며 조화롭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0.5.4 (목)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윤동주]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해설>
한국의 시인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널리 사랑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스무 살 때 쓴 시입니다. 윤동주를 일컬어 흔히 '별이 시인'이라고 하지요. 맑고 수수한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 시심의 바탕에 바로 동시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무엇 하나 넣어 둘 것 없는 '가난'한 일상을 오히려 운치 있게 '풍족'하다고 생각해 보이는 역설이 빛납니다. '주먹 두 개 갑북갑북'할 때의 앙증스러운 질량감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듯하지요. 윤동주는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1938)부터 더는 동시를 쓰지 않습니다. 별을 꿈꾸고 노래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지요. 자신에게 동시를 빼앗은 현실을 세상 앞에서 그는 점점 고뇌에 가득한 얼굴이 되어 갔지요.     ---5/5 (금) 소설가 박덕규

 

 


[정두리]

 
어머니의 눈물


회초리를 들었지만 차마
못 때리신다.
아픈 매보다 더 무서운
무서운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어머니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어머니의 굵은 눈물에 내가
젖는다.


<해설>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한 아이가 꾸중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매를 맞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그 매를 맞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때리는 어머니보다 때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무섭다는 사실을. "차마 못 '때리고 눈에 내비친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깨달아 버렸거든요. 쉽게 상처 받기 쉬운 아이들의 감정을 감각화하는데 능란한 솜씨를 빛내는 정두리(1947년생) 시인이, 못난 자식 앞에서 겉으로 엄격하되 속으로 울곤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 뭉클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 5/8 (월) 소설가 박덕규

 

 


[손동연]


소와 염소


소가
아기염소에게 그랬대요.
"쬐끄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염소가 뭐랬개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게…….


<해설>
차츰 사라져 가는 토속적 정취를 구수하게 살려내는 데 익숙한 시인 손동연(1955-)의 동시입니다. 기린, 돌고래, 코끼리 등 우리가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 연작 동시 중 한 편입니다. 풀밭에서 나란히 풀을 뜯고 있는 소와 그 곁을 우연히 지나게 된 아기염소가 서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군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한가로운 장면에서부터 시인은 재치 있는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염을 어른처럼 기른 아기염소, 덩치 큰 어른이면서도 아직도 '음매'하고 우는 소의 말다툼이 너무 정겹지 않아요? 조용히 흐르는 일상의 한 순간에도 무한한 관계 맺음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도 같군요.     ---5/10 (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제해만]

 
봄눈


파릇파릇 새싹 돋는 날
봄눈 내렸다.
몰래몰래 내리려다
밭고랑에 빠졌다.


<해설>
주로 계절을 제재로 삼아 자연을 노래해 온 제해만 (1944-1997) 시인의 동시입니다. 봄이 오면 겨우내 얼어붙고 메말랐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움틉니다.겨울의 모든 추위를이겨내고 드디어 새싹을 틔우는 축복의 봄날, 시새움이라도 하듯 하늘은 눈을 뿌립니다. 꽃샘 눈바람은 분명 새싹에겐 호된 시련이 될 테지요. 그것이 가엽고 애처로워 봄눈이 "몰래몰래 내리려다 밭고랑에" 빠진 것으로 노래했습니다. 이른 봄이라는 계절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어린 새 생면의 약동을 기원해 주는 절묘한 표현이지요.

---5/11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문삼석]

 
우산 속


우산 속은
엄마 품속 같아요.
빗방울들이
들어오고 싶어
두두두두
야단이지요.


<해설>
이슬, 아기, 바람 등을 소재로 한 연작과 짧은 동시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문삼석 시인(59)의 동시입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비가 내리네요. 비오는 날이면 우산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지요.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우산 속은 "엄마 품속"같이 안전한 곳이니까요.그러니 누구든 그 속으로 들어오고 실어할 테지요. 저것 봐요. 빗물도 우산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다가, 그새 "두두두두"하고 야단 난 듯 소리치잖아요.
이 동시는 절제된 언어로 이런 천진한 상상력을 낳게 하는 시적 호과를 주었답니다.

---5/12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윤석중]

 
먼 길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해설>
멀리 길을 떠나야 하는 젊은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기가 잠드는 걸 한 번 보고 가려 하는군요.그런데 아기는 아빠가 멀리 가신다는 걸 눈치라도 챈 것일까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아빠를 쳐다보는 아기의 얼굴이 생생하지요?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는 아빠의 심정(실제)에서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는 아기의 심정(상상)으로의 전이가 빛을 발했습니다. 동시계의 거목 윤석중(1911년생) 시인이, 이 시가 뜻밖에도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징용을 가게 된 사람 집안 얘기라고 밝히시는군요. 아픈 사연이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광경이 되지 않았을까요?    ---5/13 (토) 소설가 박덕규

 

 


[강소천]


사슴 뿔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꽃이 피니?


<해설>
동물의 머리에 난 뿔은 위엄을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다급할 때는 싸움을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한가로이 풀을 뜯다 가끔 고개 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는 사슴의 머리에 돋은 뿔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요. 그 뿔은 마치 겨울 나무의 앙상한 가지 같아 보이지요. 거기서 곧 싹이 나올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그 가지 끝에 꽃이 피어날지도 모르지요. 삶에서 잃어 버린 것을 꿈의 세계에서 찾아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명성을 날린 동화작가 강소천 (1915-1963)은 한편으로 주변에서 만나는 작은 사물로 이렇게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를 빚어내는 시인이기도 했지요.   ---5/15 소설가 박덕규

 

 


[신형건]


봄날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 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움이 트려나 봐요.


<해설>
어린이와 같은 천진한 성정을 지닌 신형건(1965년생) 시인의 동시입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무릎을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피가 나면 으레 겁이 나서 울음을 터뜨린 기억도 또렷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의 '피딱지'를 "잘 여문 꽃씨"로 연상해내고, 상처가 아물 때 느끼는 '근질근질'한 증세를 봄날 "새움이 트는" 징조로 유추해낼 수 있을까요?이 기발한 착상과 예리한 관찰력은 단연 이 동시를 읽는 즐거움이 되지요. 시인은 일상의 경험에서 이렇듯 신선한 이미지를 생성해냈답니다.

---5/16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김종상]


산 위에서 보면


산 위에서 보면
학교가 나뭇가지에 달렸어요.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속속
얼굴을 내밀지요.

장난감 같은 교문으로
재조갈재조갈
떠밀며 날아 나오지요.


<해설>
학교 생활에서 어떤 시간이 가장 즐거울까요? 점심 시간, 아니 그보다도 종레 시간이 아닐런지요. 학교가 파하자마자 창문으로 얼굴을 쏙 내미는 아이,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만족감과 해방감으로 상기되어 있지요.그런 전경을 산 위에서 보면, 학교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참새네 집 같을 거예요. "재조잘재조잘"거리며 마냥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몰려 나오는 아이들은 방금 새장에서 놓여난 영낙 없는 참새들이지요. 교직에 몸담아온 김종상(1935-)시인은 생활 경험에서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의 참 모습을 발견해냈답니다.   ---5/17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김구연]

 
국어 공부


염소가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 먹어 버렸다.
그리고는 매일
매애애 매애애……
국어책 외운다.


<해설>
국어책을 외우는 염소를 보았나요? 염소는 왜소한 체구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이지요. 종이도 잘 먹는답니다. 아, 염소가 그새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먹어 버리고 말았군요.그리고 "매애애 매애애" 울음 소리를 내면서 계속 되새김질을 하고 있네요.아마 국어 공부를 하나 봐요.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들을 이렇게 외우는 거야' 하듯이 입을 놀리네요. 동물의 행동 특성을 잘 관찰하면서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 놓은 김구연(1942-)시인의 시적 재치가 돋보이지요.

---5/18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찬중]


겨울 밤


누가 왔나?
다시금 숨 죽여 귀기울이면
간간이 바스락거리는
뒷마당 대숲 바람소리
먼 곳 개 짖는 소리.
하늘 가득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해설>
겨울 밤이 너무 깊고 고요해 오히려 눈이 말똥해지고 귀가 쫑긋해졌군요. 그 밤에 특별히 누가 찾아올 리있을까요? 그런데도 조금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떤 설렘 속에서 결국은 들창을 열곤 하지요. 대숲 바람소리, 먼곳 개 짖는 소리……. 그 익숙한 자연들이 어느 순간에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별"들처럼 신비한 동무로 곁에 다가오는 경험이라니! 별,별,별….하는 동안 진짜 우리 머리 위에서 굵은 별들이 떨어져 내리는 듯
하는군요. 토속적인 자연의 세계를 감성적으로 드러내온 박찬중(1952-) 시인의 동시입니다.   ---5/19 (금) 소설가 박덕규

 

 


[정지용]


별똥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 보러,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해설>
자연의 움직임에 대해 궁금증을 품으며 지내던 어린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테지요. 어젯밤 우리의 어린이들도, 맑은 밤하늘에서 빗금을 그으며 떨어진 별똥을 보고는 밤새 잠을 뒤척였을지도 모르지요. '저 떨어진 별똥을 주우러 가자.'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어린 날을 참 가슴 벅차게 했지요. 그리고 그런 유의 상상은 대개 현실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지요. 모두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런 상상이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던지요. 20세기 전반에 유입된 서양의 '현대의 정신'을 동양의 문학 전통에서 조율하면서 한국 정신주의 시의 절정을 이룬 정지용 (1903-?) 시인의 동시랍니다.    ---5/20(토) 소설가 박덕규

 

 


[서재환]


초승달


얄미운 새앙쥐가
하늘에도 사나 봐요.

낮에는 숨었다가
밤만 되면 야금야금

둥근 달 다 갉아먹고
손톱만큼 남겼어요.


<해설>
시조에 동심을 담고 전통 문학 양식도 계승하고자 한 '쪽배'라는 동시조 동인이 있답니다.동시조 창작에 열정을 기울인 서재환(1961-) 시인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예로부터 달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요. 농사를 지어 온 우리 민족은 달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답니다. 아직도 달맞이 풍속이 내려오고 있지요. 앗! 오늘은 초승달이 떴군요. 우리가 잠든 사이, 하늘에 사는 얄미운 새앙쥐가 둥근 달을 밤마다 야금야금 갉아 먹어서 정말 저렇게 작아졌을까요? 시조라는 일정한 형식에 시적 상상력과 동심을 이렇듯 자유롭게 담아내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5/22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목월]


여우비


땡볕 나는데
오는 비
여우비

시집가는 꽃가마에
한 바울 오고

뒤에 가는 당나귀에
두 방울 오고

오는 비
여우비
쨍쨍 개였다.


<해설>
뙤약볕이 내리쬐는데 비가 오다니…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금새 그치고 마는 그 비를 '여우비'라 합니다. 비는 날 궂을 때 오는 것이라는 상식에서 생각하면 '여우비'란 이상한 자연 변화이기도 하고, 그냥 자연의 일이기도 하지요. 이런 '땡볕 속의 여우비'란 모순이,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이'에게 품어진 어떤 사연에 대해 유달리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오는 비/여우비'하면서 얻어진 운율감에 배여 있는 알 수 없는 슬픈 정조는, 바로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 박목월(1917-1978)시인이 빚어냈답니다.    ---5/23(화) 소설가 발덕규

 

 


[권정생]


달팽이


달팽이 마을에
전쟁이 났다.

아기 잃은 어머니가
보퉁이 등에 지고 허둥지둥 간다.
아기 찾아간다.

목이 메어 소리도 안 나오고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하고
아기 찾아간다.

달팽이가 지나간 뒤에
눈물 자국이
길게 길게 남았다.


<해설>
달팽이 나라에도 전쟁이 있겠지요. '허둥지둥' 하지만 실은 얼마나 '느릿느릿'할까요.그러다 아기를 잃고 우는 엄마도 있을 테지요. 아기를 찾다가 기진맥진,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네요. 달팽이 나라에도 6·25가 있고, 아기 잃은 이산 가족의 슬픔이 있었을 테지요.이렇게 되니, 이 이야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장편 동화 '몽실언니'에다 분단의 비극을 담아 보인 권정생(1937-) 작가가 여기 조그만 달팽이에다 한국의 역사를 흘려 놓은 거지요. 하지만 달팽이가 남긴 긴 "눈물자국"은 너무 생생해서 도리어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5/24 (수) 소설가 박덕규

 

 


[공재동]


식은 밥


짝찌와 싸우고
울며불며 돌아와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식은 밥을 먹는다.

그 눈물
아귀아귀
볼우물에 고인다.


<해설>
언젠가 언짢은 일로 다시는 안 볼 듯이 짝지와 싸운 적이 있지요.힘에 부처 이길 수 없을 땐 분해서 눈물이 나오지요. 울면서 돌아온 집에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욱 서럽지요. 분이 삭진 않았지만, 힘쓴 탓에 배가 고프답니다. 훌쩍거리며 혼자 먹는 식은 밥이 웬일인지 입아귀에서 넘어가질 않습니다.자꾸만 목에 걸립니다. 짝지와 싸운 일도 따라 목에 걸립니다. 은근히 마음이 아려옵니다. 씹던 밥이 불현 듯 또다른 슬픔이 되어 볼우물에 고입니다. 공재동(1949-) 시인은 이렇듯 아픔을 깨달으며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5/25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권태응]


감자 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해설>
신라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은 탄금대는 충주에 있지요. 이 탄금대에 노래 비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이 동요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곳 충주에서 태어나 농촌 정서를 단순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시어와 운율에 담아 노래해 많은 어린이들에게 풍성한 상상력을 제공했던 권태응(1918-1951)시인을 기리려는 것이지요. 세상의 일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 투성이지만, 세상의 때를 벗고 처음의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보면 의외로 그것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금새 확인될 수 있는 사실도 아예 믿지 않게 된 풍조를, 단순한 어휘와 리듬의 규칙적인 대조와 반복을 통해 씻어내면서 환한 웃음을 웃게 하는 한 편의 동시가 아닐 수 없답니다.

---5/26 (금) 소설가 박덕규

 

 


[유경환]


꽃사슴


아가의 새 이불은
꽃사슴 이불.

포근한 햇솜의
꽃사슴 이불.

소록소록 잠든 아가
꿈속에서

꽃사슴꽃사슴
타고 놉니다.


<해설>
꽃사슴은 아가 닮아 귀엽고 순한 짐승이지요. 아기는 예쁜 꽃사슴이 수놓인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햇솜을 다져 넣어 포근한 새 이불은 아가를 깊은 잠 속으로 소록소록 빠뜨립니다. 때때로 아가의 고운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감돕니다.오물오물 입을 다시다가 발름발름 숨소리를 냅니다. 고사리 손을 도르르 말며 생긋 웃습니다. 아, 그렇군요. 꽃사슴을 탄 아가가 뿔을 꼭 잡은 것일 테니까요. 아가는 지금 한창 꿈나라에서 이불에 수놓인 꽃사슴과 즐겁게 노는 중이랍니다. 유경환(1936-) 시인은 현실과 꿈을 조화시켜 아가의 해맑고 고운 세계를 그렸답니다.   ---5/27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하청호]


잡초 뽑기


풀을 뽑는다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다.
흙 또한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뽑히지 않으려고 푸들거리는 풀
호밋날에 칼빛으로 빛난다.
풀은 작은 씨앗 몇 개를
몰래
구덩이에 던져 놓는다.


<해설>
풀을 뽑아 본 적이 있나요? 쓸모 없는 잡초지만 쉽게 뽑히질 않지요.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에도, 풀은 푸들거리며 흙을 움켜잡고 흙은 숙명처럼 뿌리를 움켜쥐며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한 힘을 다할 테니까요. 뽑히는 자의 처지에서 보면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겠어요? 세상의 모든 생물은 끝까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답니다. 결국 풀의 처절한 저항은 무의미하지 않았답니다. 자신의 생명을 잇는 '씨앗'을 자신이 뽑혀져 나온 그 구덩이에 몰래 던져 놓았기 때문이지요. 생명 있는 것의 모짊과 존귀함을, 하청호(1943-) 시인은 '잡초 뽑기'를 통해 일러 주었답니다.   ---5/29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문구]

 
산너머 저쪽


산너머 저쪽엔
별또이 많겠지.
바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해설>
토속적인 사투리 어투로 우리 농촌의 삶과 정서를 감칠맛 나게 드러내 온 '관촌수필'의 이문구 (1941-) 작가가 쓴 동시입니다.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한 장의 상상화가 그려집니다. 밤마다 별똥이 서너 개씩 떨어진 '산너머 저쪽에는' 정말 별똥이 수북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 떠올리며 설레는 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산너머 저쪽'에 바다가 있다니,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별똥 떨어져 쌓이는 곳이기를 지나 별똥의 무리 은하수가 흘러가 '바다'가 된 그곳, 정말 그곳은 한번의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 잠 못 이룰 수 없게 하는군요.    ---5/30(화) 소설가 박덕규

 

 


[이정석]


어린이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해설>
바구니에 꽃게들을 담아 놓으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려고 바둥거리는 본능, 그 건강한 생명력을 보이겠지요. 거기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순진무구한 꿈이 느껴지지 않나요? 움직이는 꽃게를 손끝으로 톡 건드려 보세요.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눈치 보며 또다시 개구쟁이처럼 살곰살곰 움직이려 들지요. 그런 꽃게들의 천진한 행동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지요. 바로, 귀엽고 천진무구한 어린이와 꼭 닮았잖아요. 꽃게의 행동을 어린이에 비겨 표현한 이정석 (1955-)시인의 예리함이 돋보입니다.    ---5/31 (수)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한석윤]


조선의 참새


챠챠
중국 참새는
중국말로 울고

쥬쥬
일본 참새는
일본 말로 울고

짹짹
조선의 참새는
조선의 새라서
남에거나 북에거나
우리말로 운다.

짹짹
하얀 얼 보듬는
조선의 참새


<해설>
분단된 조국을 가슴 아파 하는 데는 국적이 다른 우리 동포라고 예외일 이 없습니다. 중국 옌볜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조선족 한석윤 (1943-) 시인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 자신의 다국적(多國的)인 역사 체험에서 새 울음 소리에 대한 언어 표현을 시적 소재로 이끌어냈군요. '남과 북이 한마음이다.'하는 흔한 생각을 "챠챠" "쥬쥬" "짹짹" 등의 의성어의 다름과 같음에 견주어 생동감이 생겼습니다. 참새가 우는 평범한 일도 이제 "하얀 얼 보듬는" 소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지요.

---6/1 (목) 소설가 박덕규

 

 


[박신식]


휴전선


앞뒤로
서로 다른
열쇠 구멍이 있는
기이다란 자물통


열리지 않지?

혹시
서로 열쇠를 바꾸어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설>
우리는 반 세기 동안 남북으로 오가는 길에 '휴전선'이란 "기이다란 자물통"을 채워 놓고 살아왔습니다. 이젠 정말 그 길을 활짝 터 주고 싶어요.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우리는 왜 그토록 녹슨 자물통 하나를 열지 못하는 걸까요? 남과 북이 열쇠를 바꿔 가진 탓일까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과 국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근심하는 마음이 바로 훌륭한 열쇠일 테지요. 박신식 (1969-)시인은 남과 북이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염려하는 마음으로 '휴전선'이란 자물통을 함께 열어보자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6/2 (금)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상현]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차는
오지 않습니다.
가지도 않습니다.

서울에서 함경도 원산으로 가던
기차 소리는
바람에 날아가 풀씨가 되었습니다.

골짜기에 메아리 치다
보라빛 산나물 꽃이 되었습니다.

기찻길은 잃어 버린
병사의 숟가락처럼
풀밭에 녹슬고.


<해설>
서울과 함경도 원산을 오가는 기차가 있었지요. 오십 년 동안 그 기차는 버려지고, 녹슨 기차길 위로는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마지막 기적 소리는 그때 돌아올 곳을 읽고 떠돌다 긴 세월 속에서 바람이 되고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철마는 퇴색되어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이상현(1940-) 시인은 다만 그것을 지금 눈앞에 있는 듯 그려 놓았을 뿐이지만, 그 그림 속 아득한 곳에서인 듯 들려오는 철마의 외침은 우리 가슴을 오십 년 한(恨)의 빛깔로 물들게 하는군요.   ---6/3(토) 소설가 박덕

 

 


[김원석]

 
너와 내가 없는 강


꽃봉오릴 틔울
한 방울 이슬이

묵은 꺼풀 씻어 내릴
한 자락 빗물이

나, 이슬 아니고
너, 빗물이 아니어
서로 섞여 흐르고

때론
이슬이 빗물같이
빗물이 이슬같이
서로
함께 흐르는 강.


<해설>
참 좋은 일 했구나 하는 뿌듯함이 느껴질 때가 있을 테지요. '꽃봉오리를' 틔우게 하는 일, 남의 몸에서 "묵은 꺼풀을 씻어" 내리는 일…, 이런 일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그런데, 알아둘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좋은 일에 취해 남이 한 소중한 일을 무시한 적 없었나요? 더욱이 동무 사이, 동포 사이라면, 내 자라부터 하기보다 남의 사연에서 먼저 참 가치를 읽어 주어야 '너와 내가 없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6/5(월) 소설가 박덕규

 

 


[권영상]


비무장 지대


슬픈 일일수록
새들은 빨리 용서할 줄 안다.

우리들보다
더 힘들게 살면서도
언제나 우리들보다
더 먼저 용서하는 새들

지난 일을 잊기 위해
새들은 소총 소리 들리는
숲을 찾아와

거기에다
편안한 집을 짓는다.

지뢰가 흩어진 숲속을
우리들보다 더 먼저 찾아와
탄탄하게 집을 짓고
따스한 알을 낳는다.


<해설>
한반도의 허리엔 비무장 지대라는 금단의 구역이 있답니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지요.아직도 "지뢰가 흩어진"그 숲 속 어디에선가 소총 소리 들려 오지만, 새들이 어느새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고 있었습니다. 새들이 "우리들보다 더 먼저" 슬픈 일을 용서했기 때문일까요? 권영상 (1953-) 시인은 그 새들의 '탄탄한 집과 따스한 알'과 같은, 서로의 용서로 엊을 수 있는 남북의 아름다운 화합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헨리 뉴볼트]



밤이 오고
올빼미가 나와 있어요
딱정벌레들은 주위에서
윙윙거리지요.

아이들은 안전하게
잠을 자고 있지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지요.
(장경렬 옮김)


<해설>
하루를 열심히 살고 이제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습니다. 이 이상으로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꿈꾸는 평화란 실은 이렇게, 일한 후 주변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하게 잠을 자는 것으로 절로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이 평범한 진실을 잊고 끝간 데 없는 욕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올빼미 울고 딱정벌레 나는' 밤을 못 견뎌하지요. 그러나 욕심 버리고 자연이 내는 소리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끝'에서 새로운 내일을 예비할 힘을 얻는답니다.   ---6/7 (수) 소설가 박덕규

 

 


[박 일]

 
할아버지 안경


고향 가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안경을 끼신다.

통일되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안경을 끼신다.


<해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행복일 테지요. 떠나온 고향에 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그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고향 가는 길'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지금쯤 고향 산천은 얼마나 변했을까…, 부모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이런 생각으로 오늘도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낀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박 일 시인은 거듭 안경을 끼시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반복해서 표현하면서 통일의 절실함을 부각시켜 놓았습니다.    ---6/8 (목) 아동문학 평롲가 김용희

 

 


[김 현 ]


초여름


가슴이 콩콩 뛰고 있대요.

미술 시간 그림 다 그려 놓고
칭찬 기다리는 아이처럼,

푸르게 파아랗게 칠해 놓고
환하게 눈웃음 지으며

칭찬깨나 기다리고 있대요.
눈치깨나 살피고 있대요.


<해설>
녹음이 짙어지고 있지만, 불쑥불쑥 닥쳐오는 무더위에 그만 일손을 놓고 싶을 때가 있군요. 올 여름은 과연 무엇을 가져다 줄까요? 난리와 같은 장마? 숨이 가쁜 가뭄? 신나는 휴가? 그러나 그 여름은 무슨 운명이거나 한 듯 제 마음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즐거운 놀이와 흔쾌한 휴식을 제공할 여름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요. 불행했던 지난 날들의 여름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앞의 시간들을 우리 스스로 '환한 웃음'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일 때 이 초여름은 김 현(1970-) 시인의 시에서처름 '가슴 콩콩 뛰는' 설렘으로 충만해 있게 되지요.    ---6/9 (금) 소설가 박덕규

 

 

[유희윤]

 
비오는 날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해설>
비가 오는 궂은 날에 '새는 구두'와 '젖은 발'의 만남은 운명이지요. 오래도록 신고 다닌 구두는 이젠 낡아서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남이 지닌 약점은 더 잘 보이는 것일까요? 비오는 날, 구두는 발 젖은 것을 보고 있고, 발은 구두 새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요.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불편을 주는 상대의 약점을 꼬집어 말하지 않고 오히려 '안쓰럽다'며 위로한답니다. 유희윤(1944-) 시인은 딱한 사정일수록 서로 가엽게 여기며 위로할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비오는 날 '발과 구두'의 관계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6/10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경용]


귤 한 개


귤 한 개가
방을 가득 채운다.

짜릿하고 향깃한
냄새로 물들이고,

양지짝의 화안한
빛으로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맛으로 물들이고,

귤 한 개가
방보다 크다.


<해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자기 생각을 자랑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우리 집, 내 방도 예외라 할 수 있을까요? 방 주인을 닮아 현란한 꽃들과 거창한 표어들로 치장된 그 방은 실은 생기를 잃고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어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 방에 화기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웬일일까요?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사람이야말로 남들까지도 '향깃한 냄새'로 감싸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박경용(1940-) 시인의 '귤 한 개' 이야기에서 배운답니다.    ---6/12 (월) 소설가 박덕규

 

 


[박경종]


노마


순이와 싸우고
노마는
장독 뒤에 혼자 앉아 있다.

울 밑에서 꼬꼬가 뛰어와서
"꼬꼬꼬꼬……"노마를 부른다.

노마는 노마는
대답을 않고 손가락으로
글만 쓴다.

<순이 순이 순이>라고.


<해설>
소꼽동무와 다툰 노마는, 우울한 마음으로 장독 뒤에 앉았습니다. '꼬꼬' 와 '바둑이'가 재롱을 피워도 다 싫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고집을 피웠을까? 무심히 땅바닥에 낙서를 합니다. '순이 순이 순이'라고 쓰면서 마음속으로는 '미안미안 미안' 하면 되뇌어 봅니다. 이제 순이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 박경종(1916-) 시인이, 이성의 친구와 싸우고 나서 화해하고 싶은데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이중적인 심리를 소박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6/13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서정슬]


소녀의 기도


제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요?
귀뚜라미 다리 하나 뗀 일이 있어요.
그놈은 방안을 운동장인 줄 알았나 봐요.
펄떡펄떡 뛰다가 앉아 있길래
가만히 뒷다리를 잡았더니 떨어졌어요.

그보다 훨씬 더 아주 어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해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는 법이지요. 여기 그 숙명을 기도로 견뎌내고 있는 한 소녀가 있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라고는 개미 죽인 일과 귀뚜라미 다리 뗀 일밖엔 없습니다. 그것도 죄일 수 있으니까, 소녀의 기도는 더욱 처절하고 그래서 또 아름답습니다. 티끌만한 잘못까지도 일일이 뉘우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선천성 뇌성마비를 알아 온 서정슬(1946-)시인의 세 연짜리 동시 중 아래 두 연입니다.    ---6/14 (수) 소설가 박덕규

 

 


[윤복진]

 
씨 하나 묻고


봉사나무
씨 하나
꽃밭에 묻고,

하루 해도
다 못가
파내 보지요.

아침결에
묻은 걸
파내 보지요.


<해설>
까만 씨앗 하나 묻어 놓는데, 거기서 파릇한 싹이 돋고 꽃이 핀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요? 그러기에, 꽃밭에 봉사(복숭아)나무 씨앗을 심은 아이는 혹시 싹을 틔우지 못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한 일이 어떤 결실을 맺을까 조바심 내다가 때로는 일을 그르치기도 할 것이지만,그런 호기심이나 궁금증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일제 강점기 때 동요 시인으로 활약하다가 분단이후에는 북한에서 살았던 윤복진(1907-?)시인이 지은 동시입니다. 씨 묻은 데를 파 보는 아이처럼, 그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군요.    ---6/15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엄기원]

 
동무끼리


동무끼리
얼굴을 마주 보아라.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입을 꼭 물고
웃지 않기 내길 하여도,

코가 벌름벌름
귀가 쫑긋종긋

어느새 동무끼리
입이 열린다.


<해설>
가까이 살면서도 얼굴 마주 보지 않고 사는 동무는 없는지요? 아무리 골 깊은 싸움을 한 사이라도 두 사람이 오래 사귄 동무였다면 딱 한 번만 고개 들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만 하세요. 절대로 웃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눈을 무섭게 부릅떠도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코가 벌름 귀가 쫑긋' 해지고 어느새 대화를 시작하는 사이가 '동무끼리'이지요. 자, 오랜 세원 외면하다가 비로소 얼굴 마주 본 우리들, 이제 절로 마음 열린 대화를 할 때입니다. 엄기원(1937-) 시인이 동시의 한 부분으로써 그런 대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6/16 (금) 소설가 박덕규

 

 

 


[한인현]

 

귀머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디 가셔요?"
"오오냐, 순인 집에 있나 보더라."
"아아뇨,어디 가시냐구요?"
"글쎄 가 보아라, 공부하나 보더라."


<해설>
나이가 들면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멀게 되지요.다른 사람 말이 잘 들리지 않아 갑갑할 테지요. 하지만 할아버지들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아차린답니다. 길에서 "어디 가셔요?"하고 인사하는 아이를 보고 단번에 손녀 친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순인 집에 있나 보더라 하고 자상하게 일러 주잖아요. 한인현 (1920-1969)시인이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귀 어둔 할아버지를 통해,우리 삶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보다 그 속에서 전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군요.    ---6/17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정환]


길도 잠잔단다


어어, 엄마!
길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래, 길도 밤엔
어둠에 안겨 잠잔단다.

해님이
내려올 때까지
곤한 잠을 잔단다.


<해설>
마냥 흔쾌한 일들만 펼쳐질 것같은 나날이 있기도 하지요. 절망하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이들에게 달콤한 음식과 신나는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더 바빠도 좋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 속에서 술을 마시며 가슴 벅차 있을 사람도, 더 많은 땀을 흘려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할 사람도, 밀려 드는 어둠이 시키는 대로 몸을 맡기는 법을 잘 알아야겠지요. 이정환(1955-) 시인이 어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아이의 사연으로, 곤한 잠으로 이어지지 않는 하루는 아무리 보람찬 것이었더라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군요.    ---6/19 (월) 소설가 박덕규

 

 


[김종길]


촛불


엄마,
촛불이 말을 해요.

돌아가신
할머니가 하시는 듯한

그런
얘기를,

엄마,
촛불이 얘기를 해요.


<해설>
촛불은 촛물을 떨어뜨리게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급히 몸을 도사리며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옛날에 할머니가 들려주려다 다 못한 그 얘기인지도 몰라요. 바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런 얘기일 테지요. 김종길(1926-)시인이 아이의 천진한 눈으로 사물에 내재된 정과 꿈의 시간을 읽어내면서,우리 현실이 잊고 있는 소중한 세계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6/20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임금산]


두만강


강 저쪽에도
하얗게

강 이쪽에도
하얗게

빨래들이
춤을 춘다.

마을마을
하아얗게

그리운
깃발.


<해설>
뻔히 눈앞에 보이는 곳, 그곳에서 손 흔드는 사람들 …. 그러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주 말해 왔지요. 중국 옌볜의 조선족 림금산(1960-) 시인은 그것을 국경의 강 양쪽에서 나부끼는 빨래의 모습으로 간단히 보여 주는군요. 그 하얀 빨래는 우리네 엄마들의 땀이 서린, 그러니까 살 비비며 살아온 우리네 가족사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우리 집 빨래이면서, 오래도록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사연이 얹혀 우리 모두에게 '눈에 선연한 하얀 깃발'이 되었습니다. 이제 과연 그 깃발을 내릴 때가 온 것일까요?
---6/21 (수) 소설가 박덕규

 

 


[노원호]


강물


강물이 흐른다.
바람의 손목을 잡고 소곤거린다.
천날 만날 아래로만 흐를 줄 알았지
제 속을 들여다 보지 못한 강물
이제야 알았나 보다.
제 가슴에 내린 하늘이
그렇게 파란 것인 줄을.
여름날 강물은
눈이 더 파래진다.


<해설>
강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늘 자신의 몸을 낮추어 흘러 가지요. 간간이 바람과 소근대느라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어느 날, 그 강물은 더욱 파랗게 보입니다. 자신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한 층 어른스러워지는 이치를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지요. "제 가슴에 내린 하늘 "까지 보는 강물의 모습이 참 의젓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성찰하면서 얻는 삶의 건강함을 노원호 (1946-)시인은 깊어지는 강의 푸르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6/22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바스코 포파]


당나귀


때로 당나귀는 물기도 하고
때로 먼지로 목욕도 하지요.
그래서 당나귀를 알아볼 수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당나귀의 귀를 볼 뿐이지요.
어느 혹성의 머리 위에 달린,
당나귀 표시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해설>
남이 나를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애써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는 것이 미덕일까요,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남에게 비친 모습이 아니라, 자기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겠지요. 삶의 중요한 과정이라면 '먼지 자욱한 길을 걷고, 억울해서 마구 우는' 일이 드러나도 좋겠지요. 신기하게 생긴 외양만으로 남을 평가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오해의 골 속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요? 티가 묻은 속내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드러내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참다운 관계가 가능하다는 말을 이 동시가 하고 있군요.    ---6/23 (금) 소설가 박덕규 우수 동시 3
 

출처 : 봄 못 숲 길
글쓴이 : 소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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