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사랑방

그날 우리는 안개의 주문을 들었다 - 이건선

여성국장 2012. 7. 28. 23:58

 

 

이건선




 

▣ 시인의 약력
 

1938년 生, 강원 횡성, 호 如江

명지대 전신인 文理사대를 거쳐 건국대 국문학과 졸업

아내 박복심(50才), 1남 1녀

77 봄호 『시조문학』에 시조 천료

78 3월호 『현대문학』 시 천료 등단

87 처녀 시집 『별 하나 닦아 놓고』 ― 동천사

『응시』 동인

현재 용산고교 재직



 



 



 



 

그날 우리는 안개의 주문을 들었다.



 

XXX(시인)



 

장마철 뻐꾸기

이 건 선



 

울먹울먹 목이 메는 서러움 때문에

뱉아도 뱉아도 떫은 記憶 때문에

입덧난 여름 날씨 며칠째 뿌리는 비는

솔밭 너머 黃土길 울어 가는 뻐꾸기는

꿈길에도 들려오는



 

旌善 아리랑.

戀 歌



 



 

하나의 무게에 끌려



 

接近해 가는



 

돛단배 한 척.



 



 



 



 

말아라,

물어 보지 말아라.

피할 수 없었던 슬픔의 끝. 약속에 부대낀 피안의 기슭까지는.

우리들 서러운 가슴을 문지르면 바람이 되어 떠나가는 뼈의 노래를.

하얀 가슴으로 치달려 가야만 침묵의 노래로 가라앉을 수 있으리. 굽이치는 파도를 등에 져야만 앞서가는 물이랑 따라 산산이 부셔질 수 있으리

그때에사 알리라

남겨진 침묵, 부셔진 그대를. 끝끝내 터뜨리지 못한 울음의 내력을.

한 그루 해송으로 서 있어 좋았다. 옷고름을 풀어헤친 달빛의 숨결, 밤바다 눈물 젖어 되살아나는 제 가슴의 은비늘을 어루만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 좋다. 未明에 더욱 우람해지는 그대의 두 팔로 바다를 안고 우뚝 서 있어라.

―― 퍼덕이는 태양이 그대의 어깨를 태울 때까지.

XXX 즉흥시



 

용산역 출발. 관광버스들의 합창.

푸르렁거리는 시동음에도 소금내를 맡았다면 과장일까.

해변시인학교. 제 14회.

14회. 14회. 도대체 역사가 너무 길지 않는가. 대수롭지 않다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100년 이상이나 짓는 성당이 있다던데. 그거야말로 웃기는 일이제. 성당 따위를 백여 년이나 짓는다고. 洋물이라면서 사죽을 못쓰는 놈들이사 고속도로를 千년이나 닦아도 기분 좋을 일이겠제, 허기야 뭐 신부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판에 오래 지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오래 짓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세계의 변화를 보라. 그런데 해변시인학교를 14년이나 열었다. 트위스트에서 고고를 거쳐 디스코까지 시들해지는데도, 1000달라에서 7000달라를 바라보는, 물신만이 가치의 절대치로 군림하는데도, 心象의 시인학교는 14년을 버티었고 이 커다란 힘은 계속되고 말 것이다. 들어보라. 외국에도 시인학교라는 것이 있고, 그런 곳이 100년이나 지속되는지를.

나는 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영문학과가 생긴 것이 1920년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이 자랑하는 시인이나 셰익스피어까지도 인도를 문화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후대에 조작했다는 것을. 도대체 저들이 「마릴린 먼로」 몇 주기에는 열을 올려도 시인학교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관심이 없다.

릴케가 어떤 암캐와 어울려 다닌 수캐인지를. 도대체 바이런, 랭보, Eliot, 에즈라 파운드의 등을 긁어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는 千여 년이나 시인들만이 과거시험 자격이 있었다. 그들만이 권력의 상층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저들은 시가 무엇인지 몰랐다. 공부는 수도사들에게 맡기고 귀족들은 파티나 열어 맨살 문화만 개발했다. 최근에는 詩다 뭐다 하면서 노벨상인지 뭔지 만들어 자기네들끼리 나눠먹기까지 하지 않던가마는. 그마저 詩는 시들한가 보더라.

너희들은 그런 척했겠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우리들은 독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막히지 않았다. 순조로운 여행길이었다.

풀어놓은 햇살에 줄기줄기 산줄기마다 넉넉하구나. 동해바다 시퍼런 등허리 같구나. 만날 수 있을까. 시퍼런 은유로, 출렁이는 詩心으로 괴로워하는 참다운 詩人을.

표현이여, 나는 다시 그대의 괴로움 속에 사로잡혀 있다.

버스는 달마선사들을 싣고 동쪽으로 가는 까닭을 묻는데. 필자가 내던지 화두마저 숨가빠 설레이고 있었다. 어느덧 해발 863m의 대관령.

안개였다.

처음에는 안개의 저쪽과 이쪽이 뚜렷이 구별되었다. 두려움이었다. 안개의 밖에서 안개로 빨려드는, 안개의 안에서 안개로 변하는―.

속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차가 속력을 줄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경의 변화가 사라지고, 안개의 터널이 만들어 주는 환각이고 환시였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은 안개를 호흡하지 못했다. 솜사탕 크기로 얌전하게 숨어 있었다. 이명(耳鳴)이 울리고 고산증의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옆자리에 앉은 평론가 김만수에게 건네는 나의 말이 낯선 타인의 목소리로 되돌아 와서 머리 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화상들아. 너희들은 이제 너희들의 배냇저고리를 입어야 한다. 소학교 걸상에 앉아 넘쳐나는 너희들의 엉덩이 살을 잘라 버려야 한다. 탐욕과 더러움으로 키운 삼겹살을. 그리하여 순수로 돌아가야 한다. 캄캄해졌는가. 그대 마음의 동녘이 어두워지거든 성냥팔이 소년으로 되돌아가서 불꽃을 당겼는가. 그대의 오늘을 있게 해 준 유년의 기억 그 순수에다 입술을 문질렀는가. 젖을 빨아라. 빛의 어머니 어둠의 젖을 빨아라. 새로우리라. 모든 것을 지우리라. 은유의 덩어리를 새 날에는 빚을 수 있으리니.

― 박동규의 개회사를 XXX가 개작



 

경포 국민학교. 그때서야 알았다. 안개는 통과제의. 우리 모두는 안개의 주문(呪文)을 듣고 이곳에 모였다고.


 

솥을 건다. 밥을 짓는다.

해거름을 벗삼아 배식을 기다린다. 국민학교를 가득 채운 4백여 명의 눈빛들. 오늘밤에는 너무나 가볍게 날아오르겠지. 더러는 플라타너스 가지에 매달리고 더러는 오죽헌의 댓잎 위에서 서걱이겠지. 그리고 또 더러는 저 경포의 파도소리를 모두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은데. 아아 유년의 운동장에 심어둔 노래를 캐어 아름다운 굴렁쇠로 돌리는 별님은 누구였던가.



 

이 건선 시인.

필자에게 그의 별빛을 드리워 준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소학교의 뒤뜰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는 꽤 무성한 연밭을 이루고 있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대담을 주고 받는 즐거움은 간간이 끊어지곤 했다. 밤새 흠뻑 정이 든 독자들의 사인 공세 대문이었다.

"百편의 연가를 쓰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단 한 번만 사용했어요. 시어(詩語)에 대한 결백증이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30줄을 2줄에 요약시킵니다. 발표하기 전에는 30번이나 옮겨 적습니다. 그것이 시집 한 권만 만든 내게 변명거리도 만들어 줍니다."

그러했다. 그의 시집의 시편들에는 태작이 거의 없었다. 단순 비교 평가가 무리일지 모르나 30년대 정지용의 시집을 처음 잡았을 때 느끼는 감흥을 맛보았다. 다음 시편을 살펴보자.



 

한 낮의 사기 대접 ……… a

냉수冷水 한 사발 ……… b

쓰르라미 울음 ……… c

울 밖은 약오른 ............. k

뙤약볕 바다



 

― 이건선 <伏> 전문.



 

상기 시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분석된다. 伏을 P라 놓으면



 

P⊃a a=시각이미지

P⊃b b=미각이미지

P⊃c c=청각이미지

P⊃k k=촉각이미지

P⊃{a∨b∨c∨k}



 

이제 이건선 시인의 지향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이미지」이기보다는 「시≡이미지」인 것이다.

……중략… 그의 문화적 취미와 기호가 미술, 전통서예, 골동, 분재, 난초 그리고 水石등에 걸쳐 品과 格을 갖춘 다양한 심미안을 지녔음을 보게 됩니다.



 

― 윤강원尹江遠 시집 <별하나…>의 해설에서



 

흔히 그러하던가.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이라고, 아무래도 시인은 동파 소식과 같은 천재형의 골상을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 그의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그의 시가 재현시키는 한 폭의 그림은 동양화가 아니다. 압축과 절단, 단일 주제가 close up된 서양화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긴장 축을 따라 팽팽하게 움직이고 있는 활동사진으로 나타난다. 독자들은 긴장한다. 이마를 노리는 송곳의 날카로운 끝점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 연가 Ⅱ가 특히 그러하다.

점(點)은 사랑이고 사랑의 실체인 여인(女人)일 것이다. 돛단배 한 척은 물론 시인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소실점의 축을 따라 나선형으로 이끌려 가는 돛단배의 운명까지 동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마녀들의 노랫소리에 시달리는 유리시즈일 수도 있으며 버뮤다 해협으로 이끌려드는 선박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시인의 시작 노트를 들추어 보자.

"집중과 확산에서 충돌을 통해서 신선한 이미지 창출을 시도해 보려했다. 다만 압축된 시의 그릇 속에 나의 상상력을 확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모순에 도전 같은 충동이 강하게 작용했다. 지성과 상상력이 서로 탁 맞아 털어질 듯, 튕그러져 나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의 떨림 속에 결국 호흡이 짧은 시를 낳고 말았다.



 

여름인데, 난데없이 추성(秋聲)에 시달리는구나, 연지(蓮池)에 걸터앉아 연초록으로 수줍은 연밥을 바라본다. 추련(秋蓮)의 쓸쓸함을 채우기에는 소학교의 교정을 가득 채운 매미소리가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우리의 시인은 염복도 많으시지. 줄을 이어 시인학교의 아리따운 낭자들이 종이를 들고 사인을 받아가네.

다음날 아침.

막막해지면 할 말을 잊는가. 시심이 파도다. 엄습하여 강요한다. 말하라 마음껏 말해도 좋다. 그러나 모두들 말을 않는다. 바다도 수평선도 시인마저도 터뜨릴 수 없는 울음을 참으려 말없이 말없어라 묵시에 떨고 있는 것일까. 하얀 가슴 열어 제기고 치달려오는 바다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추락한다. 파토스적 열정으로 울부짖는 靑馬의 목소리.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꼼짝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그랬을 게다. 靑馬는. 아무 말도 못 들었을 게다. 침묵으로 떨다가 되돌아 가는 수평선의 뒷자락에 울었을 게다.

심상 1, 2, 3,……. 가족들의 깃발이 꽂힌다. 깃발을 에워싸고 옹기종기 모여드는 눈부신 엉덩이들, 장독간인가. 말없는 정다움이 흐르고 금새 바다와 친해진 눈빛에는 물빛이 출렁거리고. 필자와 시인은 푸른 물결에 몸을 싣고 조금은 먼 바다로 자맥질을 하였다. 말이 없었다. 저 바다의 깊이만큼. 그러나 안개의 주문과 침묵의 틀 깨기는 필자의 몫이었다.


 

필자는 이건선 시인의 표제시로서 <장마철 뻐꾸기>를 잡았다. 김수영의 <풀>이 가장 그답지 못하면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마찬가지로 이건선의 시는 가장 그답지 않은 <장마철 뻐꾸기>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다. 넉넉하고 청승맞은 우리 가락이 우러나오고, 「입덧난 여름 날씨」라는 창조적 비유는 한국적이면서도 참신하다. 정선 아리랑에 실린 뻐꾸기 울음소리가 黃土길처럼 붉어지며 구불구불 이어져서 태백산맥의 한(恨)을 그윽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그의 시가 Imagery의 처리에 성공하고 있다고 해도, 에즈라 파운드가 뒤를 받쳐 준다고 해도, 흠 잡을 곳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의 시를 읽을 때 미진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단히 슬프게도 시인 이건선의 몫이 아니라 평론가와 학자들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시론이 한국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시론 교과서의 내용 중, 시와 언어, 어조, 리듬에서 그러하다. 이미지, 상징, 비유 등의 장은 외국이론을 베껴 먹어도 별탈이 없을 거라는 조심스런 찬성(?)도 보내고 싶다만.



 

이 글의 서두에서 「안개의 주문」은 모든 것을 비우고 다시 보자는 것이다. 먼저 어조만 짚어 보기로 한다.



 







3음보


4음보


서민 계층의 리듬

경쾌한 맛


사대부 계층의 리듬

장중한 맛

 

이하생략


 



 

당신에게는 / 복종만 / 하고 싶어요

- 한용운 <복종> 중에서



 

만해의 시는 대개 장중한 느낌을 유장한 템포와 결합시키고 있는데 마지막 음보가 긴 3음보의 효과는 이 장중한 효과에 있다.

- 김준오, 이우출판사 p78 ~ 81 중에서



 

그런가. 3음보는 경쾌하고 4음보는 장중하다는 상관관계는 억지 춘향이 아닐까. 상기한 시 <복종>의 후장3음보격이 장중한 효과를 가지는가 모르겠다. 필자는 김소월의 진달래 꽃(후장3음보격)에서 단 한번도 장중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시의 모든 출발점은 우리 말의 특징에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조사와 어미가 왜 그토록 다양한가에 눈을 돌리면 그 속에서 우리 시의 質을 결정하는 요소가 보이지 않을까.



 

우리는 未堂, 靑馬, 木月에게서 한국적 가락과 한국적 정서를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말에서 7년 이상 묵은 장맛까지 느끼게 해 준다는데 동의하게 된다. 그래서 청마의 시 <바람에게>를 살펴보자.


 



 

바람아 나는 알것다 ―――――→ A,

네 말을 나는 알것다

…… 이하 생략 ……



 

이 글에서 첫 연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전체의 문맥은 크게 해치지 않는다.

바람아 나는 아는데 ――― a

바람이여 내가 알았어 ――― b

내가 바람을 알것다 ――― c

나는 알았지 바람을 ――― d

: : :

: : :



 

a, b, c, d와 A는 모두 3음보다. 내용도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A에서 막막한 서러움에 엉기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지만, a, b, c, d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비밀은 조사와 어미를 통해서 의미의 변별력과 탄력을 생기게 하는 우리말의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이 시의 진술에서는 통사구조가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시작을 해 본 사람은 쉽게 경험하는 바이다. 靑馬의 시가 大家風의 시, 무형식의 시(김윤식의 말)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그의 시에서 유달리 어미의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평론가들이 서구시의 이론으로는 잣대질이 곤란하여 어물쩡 무책임하게 무형식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런지.―

未堂 시의 뛰어남은 다양한 통사구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더욱이 木月 시에서 평자들은 흔히 <청노루>, <佛國寺>에서 음보율을 챙기고 리듬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 상대적 측면은 언급이 없어서 서운한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 <下棺> <나무>를 살펴 보라, 감동의 진폭과 통사구조의 호흡이 왜 그토록 일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3편의 시와 <청노루> <불국사>와는 왜 그토록 제각각인가. 그것은 우리말의 서술구조를 꿰뚫어 보고 있는 탓이 아닐까. 박목월의 <나무>를 살펴 보자.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이랄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____X1____았다. _a1_일까._b1_었다.



 

____X2____ 았다. _a2_일까._b2_었다.



 

____X3____ 았다. _a3_일까._b3_었다.



 

____X_____았다. _A_____._B_______었다.



 

박목월 <나무>의 진술구조



 

이 시에서 우리는 X1, X2, X3, X의 긴 터널이 사색과 음미의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선문답인 것이다. 그것은 未堂의 <무등을 보며>에서의 글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未堂 역시 <동천> <귀촉도>에서 뱉아내는 파토스적 핏덩이를 갖는다. 그러나 왜 <무등을 보며>에서 멀리서 산자락을 바라보듯이 호흡이 길어지고 넉넉한 통사구조를 가지는가에 주목하며 木月이 <나무>에서 왜 위와 같은 진술구조를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이제 결론으로 간다.



 

「시≡이미지」가 아니고 「시∋이미지」라는 것이다.

더욱이 1920년도에 영문학과를 만든 서구 문학 이론은 이제 접어 버리자는 것이다. 간간이 들출 필요는 있겠지만. 그러므로 이건선 시인의 시를 다시 살려보자는 것이다.

이건선 시인의 가락은 이미지 때문에 묻혀 있지도 않으며 정선 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으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 예로 「응시」동인지에 실린 <작품1>, <작품2>, <분수>, <바람 부는 섬으로 누워>등은 호흡이 길고 유장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이 살아 있는 절창인 것이다. 그의 변모에 충격을 느끼며 제 2시집을 기다리는 예비 시인들은 무척 즐거울 것이다.



 

3박 4일은 신혼여행이었던가.

달마는 서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산 첩첩 아득히 이어지고 초 닷새의 초승달이 차장에다 손짓하며 자꾸만 나부끼고 있었다.

내년에도 연초록 가슴들을 맞을 것이매, 그리움이 오히려 만남보다 낫다(想思猶勝已相逢)고는 읊지 않으리.




 

후기 ; 박동규 교수가 찾아가서 시를 쓰라는 시인은 이건청이었다. 나는 이건선을 찾아갔고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그 다음날 알았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이건선 시인은 시=이미지로 알고 시를 썼으나 감동을 받지 못하였다.
이미지의 시인은 정지용이다. 이미지가 승한 정지용의 시를 읽으면 생쌀 씹다 모래 씹는 기분이 들곤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향수>는 미국 시인의 시를 번역하다가 자신의 창작시로 발표하였다. 향수는 이미지가 숨을 죽였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감동을 준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글 속에 청마 유치환을 언급한 지금, 장마철에 밑창 뚫린 고무신 신고 논두렁을 걷다가 개똥 밟은 기분이다. 그 당시까지 나는 청마 유치환이 친일 시인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수首

유치환柳致環



 

十二月의 北海 눈도 안오고

오직 萬物이 가각苛刻하는 흑룡강黑龍江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의 모호模糊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山河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이 아니라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희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威協을 의미意味함이었으리니

힘으로서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原始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法度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烈함과 그 결의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는 무뢰無賴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風景 위에

하늘이여 은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내리고지고



 

이 시의 首는 일본군에게 잡혀 효수당한 우리 독립군의 머리이다. 그 당시 비적은 대부분 독립군이었다고 한다. 이런 개자식의 시를 좋게 여기던 날이 있었다니. 일제의 품에 안기어 신변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독립군을 닭이나 개로 여기는 시를 보라. 그리고 우리 독립군은 끝내 다스릴 수 없는 무뢰한 넋이라고 한다. 개자석의 시를 읽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밝힌다. 정의는 불의를 기록해야 한다.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