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노래 17탄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 산울림 1978)
산울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1978)
파격적이지만 침착했던 실험의 연속선
KBS 밴드 서바이벌 '톱 밴드'의 무대에 선 김창완밴드를 봤다(2011년 10월 15일). 산울림 시절 들려주었던 숱한 히트곡에 대한 여러 기대를 외면하고 밴드는 신곡 ‘Darn It’을 선보였는데, 사실 그보다 파격적인 결정은 따로 있었다. 리더 김창완의 메이크업이다. 소위 ‘조명발’을 의식하는, 하얀 피부를 위장하는 익숙한 방송용 화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무대에 섰다. 톤은 검은색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핏기 없는 고딕풍 스타일링을 하고, 덧붙여 아이라인을 강조하고, 당일 무대에 섰던 20대 밴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비주얼을 경쟁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디서나 예외 없이 ‘아저씨’로 통하는 1954년생 김창완은 푸근한 인상의 방송인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음악인 입장에서 1순위로 추구하던 가치는 파격이었다. 기원과 등장 자체가 그랬다. 김창완이 그의 두 동생과 결성한 밴드 산울림의 데뷔 앨범(1977년 12월)이 그랬고, 곧이어 나온 두 번째 앨범(1978년 5월) 또한 그랬다.
2집이라서 기량이 더 나아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게, 사실상 1집부터 3집까지 수록된 거의 모든 곡이 김창완이 대학재학 시절(1971년~)에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는 또렷했다. 1집의 ‘아니 벌써’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의 파격이 예상 밖으로 통했다는 것에 확신을 얻고, 부담을 덜고 2집에 실릴 보다 공격적인 노래들을 고른 결과가 아닐까 하는데, 앨범의 머릿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만 봐도 대번에 짐작되는 과정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아니 벌써’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계승하지만 사실상 아주 많이 달랐다. 더 나아갔다. 충분히 실험적이었지만 강력한 반복적인 전개를 통해 친근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 1집 대표곡의 내용이었다면, 2집의 대표곡은 대중적 설득 이전에 강도 높은 산울림 내면의 복잡하고 오묘한 세계를 통째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스로 말하는 산울림 음악의 특징은 “독창성, 서정성, 진취성”인데, 전에 비해 서정은 대폭 축소됐고, 도입부만 3분을 넘길 정도로 독창성과 진취성에 몰입했다.
- 앨범명
- 2집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
- 아티스트 및 발매일
- 산울림 1978.05.10
- 타이틀곡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앨범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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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매니아들이 산울림의 2집을 그들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거칠은 베이스 연주로 시작되는 대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의 전주는 국내 가요계에서는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으로 ..
문제의 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뜯어보기로 하자. 총 재생시간은 6분이 넘는다. 베이스로 시작해 연주를 계속해서 덧입히지만 사실상 단조로운 도입부가 3분 29초까지 지속된다. 노래가 터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긴장감이 사라질 만한, 사실상 무리한 진행이다. 그러다 마침내 노래가 흐르는 순간 문학적인 고백이 시작된다. 제목처럼 화자는 내 마음에 이미 주단을 깔아뒀으니 그걸 밟으며 찾아와 달라고 애원한다. 그대가 가는 길을 꽃길에, 그대를 따르는 자신을 나비에 비유하는 가사가 터지고,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렇듯 임을 향해 자신을 희생하는 신파적인 스토리텔링, ‘주단’과 같은 신선한 어휘 선택,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듯 세게 노래하는 창법 등이 보컬파트의 특징인데, 사실 언어적 표현 이상으로 두드러지는 곡의 특징은 은은하게 깔리는 연주다. 길게 뽑아 느슨하고 침착하게 지속되는 연주 안에는 드문드문 피어 오르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아끼고 아낀 건반,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기타가 그렇다.
결국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게 한다. 한참을 견딘 후 노래가 나오는 순간까지, 그리고 터진 노래들 사이에 잔잔하게 스며있는 변화의 연주들을 알아챌 때까지 사람을 붙잡아놓다. 전작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가 그랬듯 당대 유행가의 도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으면서도 전보다 침착한 실험으로 기이한 미학에 도달하고, 사실상 의중을 잘 알 수 없는 확고한 자제력으로 밀고 당기면서 규모가 확장된 환각효과를 창출해냈다. 태평한 듯 교묘하게 움직이는 이 난이도 높은 실험은 단타가 아니기도 했다. 앨범에 실린 또 다른 노래 ‘어느 날 피었네’ 또한 보컬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곡이다. 지금 들어도 이토록 생소한데, 당대에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하지만 이 난감한 사운드야말로 산울림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영향력이다. 기성의 익숙한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고 신선하면서도 조화로운 자기 음악을 주장하는 일, 그것은 당대를 주름잡았던 모든 주류 그룹사운드들의 일상적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충격적인 방식으로 음악적 의사를 개진하는 일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약점이 있다면 녹음상태인데, 아무리 화끈한 사운드를 과시한다 한들 근본적으로 곱게 마스터링된 오늘의 수많은 음악에 비교하자면 헐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되려 기술적 한계 덕에 곡이 가진 신선한 발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이제는 그 조악한 음질마저 낭만으로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이룬,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실험이었다는 얘기다. 여담으로 회고에 따르면 1977년의 김창완은 어느 은행 입사 시험과 생애 첫 녹음일자가 겹쳤다는데, 입사 시험은 또 볼 수 있지만 녹음하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다고 여겨 녹음실로 갔다고 한다. 취업을 날려버린 그날의 녹음 이후 밴드의 운명을 바꿔놓은 작품이 나왔다. 그리고 기존의 음악을 바꿔놓은 노래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산울림의 초기 음악은 유행가에 대한 반발작용이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당시에도 가요계에는 쏠림 현상이 있었어요. 당시 트로트가 주류 음악이었는데 우리가 들고 나온 사운드는 완전히 이상한 음악이었죠.” 한편 각종 가요제용 캠퍼스 밴드 음악과 포크 등 당대 주를 이루고 있던 여러 젊은 음악을 어느 정도는 참고하면서 결국은 완전히 벗어나 찾은 새로운 대안이기도 했다. 어린 날 홀로 기타를 익히면서 포크 가수들을 흉내 내고, 자격미달로 실격되거나 작곡으로 참여하면서 대학가요제의 문턱만 경험했던 산울림은 곧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지금까지도 숱한 후예들은 산울림을 역할모델로 삼지만, 다 드러내놓고 흠모하는 장기하와 얼굴들 정도를 제외하고 영웅의 음악을 어떻게 참고해야 하는지는 아직 뾰족하게 답이 나와있지 않은 상태다. 이처럼 범접할 수 없는 산울림은 해체됐지만 김창완은 홀로 밴드 생활을 지속하면서, 고딕 메이크업을 망설이지 않을 만큼 어른의 권위와 담을 쌓은 채 무대를 찾고 있다.
취미이자 직업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취미이자 직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취미일 때 즐겁지만 직업일 때 고민되는 건 몇 년째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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