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함 경(阿含經) /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아 함 경(阿含經)
묘주스님 / 동국대 교수
아함경(阿含經)은 근본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아함(阿含)은 범어 agama 의 음역(音譯)으로서 ‘전해져 옴’ ‘가르침’ ‘전해져온 가르침’ 등의 의미이다.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100년~200년경에 인도불교의 각 부파 교단에서 구전(口傳)되던 석존의 교설을
집성하여 ‘아가마’ 라고 총칭하였다. ‘전승의 사실이 명백한 경전’ ‘권위있는 경전’ 이라는 뜻을 지닌다.
한역경(아함경)은 네 부류로 나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은 주로 장편의 경전을 모은 것으로서 30경이 수록되어 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은 중편의 경전 222경을 모은 것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은 주로 단편의 경전 1362경으로 구성 된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51권은 1법에서 10법까지 법수(法數)의 순서에 따라 편찬되고 471경이 수록되어 있다. 태국등 남방불교권에는 아함에 해당되는 경장으로 현재 5니카야(nikaya. 長部ㆍ中部ㆍ相應部ㆍ小部)가 있다.
□ 아함경 교설의 특징
아함경은 단일 경전이 아니라 2,000여 가지(팔리어 니카야는 5273가지) 경전들의 모음이다.
이들 경전 속에 담긴 교설은 곧 불교 기초교리이며 후대 여러 불교 교의(敎義) 연구의 기초가 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그깨달음의 능력을 결국 스스로 성취해야 한다.
불교 경전 중에서 특히 아함경은 깨달음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는 방법으로 설해진다.
신(神)이나 우주의 생성 등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인식ㆍ관찰이 가능한 것
부터 설해진다. 그리하여 범부의 무명 업식(業識)을 붓다의 최상의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 시키고자 한다.
아함경에 담긴 교설들은 단순히 개념적인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ㆍ사색의 대상이다.
인도불교에서는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경전의 말씀이 교이고 그것을 관찰ㆍ사색하는 것이 선이었다.
옛부터 인도 종교사상계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테마가 있었다.
1)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어떤 존재들이 있는가?
2) 그 존재들은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는가?
아함경에서 1)의 물음에 대한 설명이 십이처설ㆍ십팔계설ㆍ오온설 등이고 2)의 물음에 관하여
연기설ㆍ중도설ㆍ삼법인설 등으로 설명된다.
□ 십이처설(十二處說)
이 세계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온갖 존재들이 글자 그대로 삼라만상이 공존한다.
그들 일체의 존재들은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곧 「일체란 무엇인가」와 그것들은 「오직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가」라는 두
십이처는 여섯 가지 인식기관(六根)과 여섯가지 인식대상(六境)을 말한다.
전자는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의지(意)이고,
이 십이처설에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석존의 탁월한 통찰력과 범부들에 대한 깊은 배려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곧 보이고 들리는 외부세계로 빠져든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 인식상황에서는 잊고 살 때가 많다. 이 십이처설은 단순히 인생과 세계에 대한 분류법으로서 개념적으로 이해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 이 현실의 세계를 자신의 인식의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서 바라보고 사색한다면 보이고 들리는 외부세계에 끄달리지 않고 「깨에있는 의식」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점차 번뇌가 적어지고 지혜로 전환되는 것이다.
□ 오온설(五蘊說)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현상계 모든 존재의 분류법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체득하면
십팔계설(十八界說 : 六根界ㆍ六境界ㆍ六識界)의 관찰을 지나서 이제는 오온설의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오온설에서는 일체를 인간의 인식주관과 객관으로 반씩 나누어서 하였다.
오온설의 단계에서는 관찰의 주안점이 인식의 주관, 즉 자신의 내면세계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거든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이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관조해야한다.
온(蘊)의 의미는 「근간적(根幹的)인 부분ㆍ요소」이다. 오온은 인간 나아가 일체 존재를 구성하는 5가지 근간적인 요소로서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말한다. 여기서 색(色)은 물질이고, 수(授)는 감수작용(느낌)이며, 상(想)은 표상(表象)ㆍ개념화작용이고, 행(行)은 결합작용이며, 식(識)은 식별작용이다.
이처럼 현상계 모든 존재의 분류에 있어서 감수작용 등의 요소를 넣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현실의 세계가 괴로움인 데는 감수작용의 요소(受蘊)가 중요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느낌이라는 것, 좋다ㆍ나쁘다ㆍ좋지도 나쁘지도 않다ㆍ즐겁다ㆍ괴롭다 등의 느낌이 있기 때문에 좋은 느낌의 대상에는 애착을 일으키고, 나쁜 느낌의 대상에는 배타의 갈등을 일으켜서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음 닦는 수행에서는 좋다ㆍ나쁘다는 등의 주관적인 분별심을 버리고 무심히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표상작용의 요소(想蘊)는 개념화 작용, 즉 인식상황에서 대상의 표상에 대해 언어에 의한 명칭ㆍ개념화의 작용이다. 분명 현실세계에서 언어에 의한 개념화작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종합적인 인식이 가능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문화ㆍ문명생활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명칭ㆍ개념들을 떠올리자 마자 그것들에 실체가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애착을 일으키고 고정관념에 매이게 된다. 그러나 언어에 의한 명칭ㆍ개념들은 임시적으로 그렇게 이름지었을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인 경지에는 언어를 초월한 것이며, 언어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고 각자 체득해야 한다.
결합적용의 요소(行蘊)는 주관과 객관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상태를 유지 결합하는 작용으로서 역시 현실의 괴로움에 중요한 몫을 한다. 식별작용의 요소(識薀)는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의 6가지 식 또는 그것들의 식별작용을 가리킨다. 이들 6가지 식. 즉 현실의 정신세계는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운 속성을 지닌다. 6식의 작용에 끄달리지 말고 그 6식을 초월한 내가 무엇인지 사유해야 한다.
□ 업설(業說)
우리는 살면서 갖가지 행복이나 불행을 겪게 된다. 그것들은 무엇으로부터 왜 생겨 나는가? 외부의 절대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주팔자처럼 숙명적인 것인가? 불교에서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행위의 문제가 바로 업설이며 그 취지는 결국 십악(十惡)을 경계하고 십선(十善)을 닦도록 권장하는 데 있다.
업의 의미는 ‘행위’ ‘일’ ‘지음’ 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업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 보(報)는 업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의 결과를 의미한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르게 된다. 업의 종류로서 십악업을 든다. 중생들은 선업보다 악업을 더 많이 짓기 때문이다. 열 가지 악업에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밈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
세상이 혼탁해졌다 하더라도 인과응보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주변에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인데 늘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심술굿고 남을 해롭게 하는데도 재물과 권력을 쥐고 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과연 업설이 맞는 것일까 하고 회의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얼핏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상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친 인과 관계에서 보면 합리적인 설명이 된다. 이것을 삼세업보설이라고 한다.
□ 삼법인설(三法印說)
이 세상에는 인간, 짐승, 식물, 등 말그대로 삼라만상의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속성이 있는가?
이에 관하여<아함경>에는 삼법인으로 설명한다. 법인(法印)의 의미는 법의 특성ㆍ양상이다. 상(相)이라 하지 않고 인(印)으로 번역한 것은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보편성 불변성의 진리임을 나타낸다.
삼법인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특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변상황이 달라지고 사는데 많은 고초를 겪을 때 슬픔과 좌절감ㆍ실의에 빠질수 있다. 그러나 삼법인설에 의하면 개인만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무상하고 괴로운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의 특성을 말함에 있어서 현상계만을 말할 때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고 하고, 현상과 본체를 통틀어서 말할 때의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다. 혹은 사법인이라하여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말하기도 한다. 제행(諸行), 일체(一切), 제법(諸法)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① 제행무상(諸行無常) -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상주하지 않고 늘 변화한다. 인연
화합에 의해 결과가 생겨나므로 조건에 따라서 늘 가변성을 띤다.
생명있는 존재는 모두 태어나고 늙으며 병들고 죽는다. 자연계 역시 생겨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異) 소멸된다(滅). 우주의 경우는 형성되고(成) 머물고(住) 무너지고(壞) 소멸된다(滅). 현상계의 모든 존재에는 이런 변화의 법칙이 있다.
무상의 개념은 좋은 상황에서 좋지 않은 상황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무상하기 때문에 현재의 괴로운 상황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② 일체개고(一切皆苦) -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괴로움의 속성을 띤다. 이것은 염세적이나 비관적인 견해가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즐거운 일도 많이 있다.
그러나 무상의 법칙에서 보면 그 즐거움이 영원히 가지 않기때문에 괴로움의 속성을 띤다는 것이다. 또한 괴로운 일도 괴로워만 하지 말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대처하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러한 속성을 인식하고, 오욕락에 탐닉하지 말고 귀중한 시간들을 보다 보람된 일에 사용할 것을 일깨운다.
평소 괴로운 상황이 닥쳐왔을 때 원래 현상계가 무상하며 괴로운 속성임을 알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비교적 빨리 되찾을 수 있다.
<아함경>에서는 괴로움의 종류로서 네 가지 또는 여덟 가지를 든다. 사고(四苦)는 태어남, 늙음, 병, 죽음이고 팔고(八苦)는 이에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 미워하는 이와 만남,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 오온의 존재로 되어 있음을 더한 것이다. 중생의 삶에
서 너나없이 보편적으로 겪는 괴로움들이다.
③ 제법무아(諸法無我) - 우리는 흔히 신체나 오온의 화합인 현재의 자신이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체나 오온은 임시적 존재이며 그것의 실체, 즉 자존적(自存的) 영속적 주체가 없으므로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성이나 진여의 존재마져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바로 그 참다운 나(불성,진여)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④ 열반적정(涅槃寂靜) - 현상계만이 전부가 아니고 본질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열반의 경지로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이다.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무아인 반면에 열반은 상주하고 즐거우며 진정한 자아로서 청정한 경지이다. 그것의 실현이 바로 우리 수행의 목적이다.
□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연기법은 석존께서 깨달음의 내용이자 불교교리의 핵심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생겨났으며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는 가를 밝혀준다.
모든 존재들은 마치 그물망처럼 서로서로 연관되어 존개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존재하는데 관련된 무수한 사람들, 자연, 사물, 현상들을 생각해보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연기법에 있다.
우선 흔히 혼용되는 인과법(因果法), 인연법(因緣法), 연기법(緣起法)의 개념 차이부터 살펴보자.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法)이지만 그 속에 일정한 법칙(法性)이 상주한다.
인과법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가 생겨난다는 법칙으로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법칙성이다.
인연법은 사물이 생멸변화하는 법칙성으로서 원인(因)과 조건(緣)이 화합하여 결과가 생겨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씨앗이 인(因)이면 흙, 물, 공기, 햇빛 등이 연(緣)이 된다. 연기법은 이미 주어진 상황인 인(因)보다도 특히 현재ㆍ미래에 주어지는 조건인 연(緣)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다.
연기법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법칙성으로서 모든 존재들이 마치 그물망처럼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양상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잡아함경>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되므로 저것이 소멸된다.” 라는 유명한 글귀에서 잘 나타난다.
연기법에 관하여 <잡아함경> 제12권의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니라.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저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완전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룬뒤에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해서 연설하고 드러내어 보이시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는 것이니라. 즉 무명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 - - . 나아가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집기하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결합이 멸하고 나아가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석존께서 연기법을 말씀하신 근본취지는 십이연기설에 있다. 무릇 생명있는 존재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삶을 이어가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전쟁이다. 12연기설은 현상세계에서 그런 괴로움들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12단계의 형성과정은 무명(無明, 진리에 대한 무지)■행(行,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식(識, 식별작용 또는 그 작용의 주체)■명색(名色, 정신적인 것(名)과 물질적인 것(色)이 결합된 상태)■육처(六處,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촉(觸,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여섯가지 대상과 여섯가지 인식주체가 화합된 상태)■수(受, 감수작용)■애(愛, 갈애)■취(取, 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유(有, 生死하는 존재자체의 형성)■생(生, 태어남)■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 늙고 병들고 죽으며 근심ㆍ슬픔ㆍ고뇌 등 괴로움의 큰 덩어리로 떠올라 있는 상태)이다.
이 12단계를 거꾸로 사색해 들어가면서 확인해보자. 현실의 온갖 괴로움은 왜 생겨나는가? 그것은 태어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태어났는가? 그것은 생사윤회하는 존재 자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 모태 안에서 태아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사색하는 것이다.
이 12단계를 무명■행■ - - - 생■노사우비뇌고의 방식으로 관하는 것을 순관(順觀)ㆍ유전문(流轉門)이라 하고, 반대로 현실의 괴로움으로부터 사색해들어가는 것을 역관(逆觀)ㆍ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이처럼 12단계를 순환ㆍ역관으로 사색하여 확연히 체득해야 한다.
이렇게 자세하게 12단계로 설명한 것은 ①후대 관찰ㆍ사색하는 이의 시행착오를 예방하고 ②이론체계에서 객관성ㆍ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하겠다.
□ 중도설
중도설(中道說)은 연기설과 함께 불교 교리발달사에서 핵심을 이룬다. 석존께서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실 때 중도법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하신 데서도 이 교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교설은 연기(緣起)한 존재들이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 일(一)과 이(異), 자작(自作)과 타작(他作)등의 두 극단을 초월한다는 이론이다. 중도란 중간ㆍ절반의 타협이란 의미가 아니다. 현상계의 존재는 상대적인 두 개념을 포함하는 속성을 띠므로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이라고만 말할 수 없기에 중도라고 한다.
우리는 상대적인 개념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인 개념들은 본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條件)에 따라 그렇게 나타날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좋은 약도 지나치게 먹으면 해로운 독이 될 수 있고 독도 잘 사용하면 약이 될 수 있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본래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ㆍ조건에 따라 착하게도 될 수 있고 악하게도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개념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있음(有)과 없음(無)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면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도 있는데 참으로 그러하다.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 의해 현재 그런 양상으로 떠올라 있으므로 유(有)의 측면을 띤다. 그러나 그들 존재에는 상주불변ㆍ독존의 실체가 없으므로 무(無)의 성격을 띤다. 이처럼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유와 무의 양측면을 띤다.
이런 논리로 인해서 생사와 열반ㆍ번뇌와 깨달음ㆍ세간과 출세간ㆍ선과 악 등의 상대적 개념도 하나로 융통된다. 중생의 무명 업식(業識)과 붓다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번뇌를 계기로 깨달음이 싹틀 수도 있다. 무명의 업식이 전환된 것이 붓다의 무분별 지혜이다.
중도설은 법칙이므로 모든 존재에 그 원리가 해당된다. 수행에 있어서도 ‘거문고의 비유’에 잘 나타나듯이 지나치게 급급해 하거나 반대로 안일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예를 들어 성격에 있어서도 온화함과 강직함, 감성과 이성을 상대적인 측면을 갖추어서 잘 활용해야 한다. 온화하게 대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할 때는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 사성제(四聖諦)
병을 고치려면 우선 그 병이 어떤 병이며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병이 다 나은 상태는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난 뒤에 직접 병을 치료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라보고, 현실이 괴로움의 속성이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 괴로움은 과연 소멸될 수 있는 것인지, 괴로움이 다 사라진 상태란 어떤 경지인지를 알고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실천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교설이 사성제(四聖諦)이다. 제(諦)는 “진리” 란 뜻이고, 사성제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네 가지를 기록한 진리를 말한다.
① 고성제(苦聖諦)는 현실세계의 괴로움에 관한 진리이다.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현실이 괴로우므로 그것으로부터 해탈하려는 마음과 실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개인에 따라서 갖가지 괴로운 상황이 있을 수 있으며, 일반적인 괴로움으로서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네 가지 괴로움과 이것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ㆍ미워하는 사람과 만남ㆍ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ㆍ오온(五蘊)의 존재임을 더한 여덟 가지 괴로움을 든다.
② 집성제(集聖諦)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가? 그것은 외부의 절대적 존재가 나를 성숙 시키기 위해서 시련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주팔자처럼 숙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며, 그러한 업을 짓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번뇌인 삼독심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의해서이다.
③ 멸성제(滅聖諦)에서 멸(滅)은 적멸(寂滅)의 준말로서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모든 번뇌의 불길이 소멸된 지극히 고요하고 안온한 상태이다. 삼독심을 소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경지이다. 현실 세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이상적인 세계의 제시이다.
그런데 이 열반은 죽어서나 이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현실에서 마음속으로부터 모든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지이다. 그 경지는 현실과 상대적으로 향상되고 즐거우며 자재하고 청정하다.
④ 도성제(道聖諦)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에 정견(正見, 바른 견해)ㆍ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ㆍ정어(正語, 바른 언어생활)ㆍ정업(正業, 바른 행동)ㆍ정명(正命, 바른 생업)ㆍ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ㆍ정념(正念, 바른 기억)ㆍ정정(正定, 바른 선정)이 있다.
팔정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호인 아함경의 수행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 수행체계
종교의 이론 체계는 수행을 위한 토대가 된다. <아함경>에 설해진 수행체계는 4념처ㆍ4정단ㆍ4신족ㆍ5신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의 37도품(道品)이며, 8정도를 핵심으로 한다. 이중에서 4념처ㆍ4정단ㆍ8정도는 다음과 같다.
사념처(四念處)는 수식관(隨息觀,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불교의 단전호흡법)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에서 신체ㆍ감수작용ㆍ마음ㆍ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①신체는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한다. 이로써 탐욕심을 없앤다. ②감수작용 중에서 즐거운 느낌도 무상의 이치에서 보면 결국은 괴로운 것이라고 관한다. ③마음은 변화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한다. ④법(위의 세 가지를 제외한 모든 법)에 자아인 실체가 없으며 나의 소유물도 사실은 소유자가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한다.
사정단(四正斷)은 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은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은 끊기 위해 노력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은 나타내기 위해 힘쓰고, 이미 나타난 선은 증대하도록 노력한다.
팔정도(八正道)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 실천 수행법이다. 이것은 욕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난 중이고, 올바른 깨달음에 인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수행법이다.
①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이다.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으로서 사성제ㆍ십이연기법 등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② 정사유(正思惟)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바르게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정견과 정사유의 차이점을 예로 들면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정견이고,
경우에 따라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사유의 결과이다.
③ 정어(正語)는 바른 언어행동이다. 거짓말ㆍ이간질ㆍ욕ㆍ교묘히 꾸미는 말을 하지 않고
정직한말ㆍ화합시키는 말ㆍ온화한 말ㆍ진솔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은 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ㆍ도둑질ㆍ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방생ㆍ보시ㆍ순결을 지키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 즉 바른 생계수단이나 일상의 바른 생활 규칙을 말한다.
⑥ 정정진(正精進)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곧 사정단이다.
⑦ 정념(正念)은 바른 기억이다. 무상ㆍ무아 등의 진리를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곧 사념처이다.
⑧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이다. 바른 선정법을 수행하는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다.
세계 종교 역사에서 옳지 않은 명상법에 의해서 개인으로나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 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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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드립니다.
"아함경(阿含經)은 근본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아함(阿含)은 범어 agama 의 음역(音譯)으로서 ‘전해져 옴’ ‘가르침’ ‘전해져온 가르침’ 등의 의미이다.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100년~200년경에 인도불교의 각 부파 교단에서 구전(口傳)되던 석존의 교설을 집성하여 ‘아가마’ 라고 총칭하였다.
‘전승의 사실이 명백한 경전’ ‘권위있는 경전’ 이라는 뜻을 지닌다."
.... 묘주스님은 부파불교가 전승해온 소승경전인 아함경을 왜 소승경전이라고 하지 않고 근본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근본불교와 부파불교 소승불교는 다른 것입니까?
보통 대승의 입장에서는 아함경을 소승경전으로, 부파불교의 경전으로 이해하는데 묘주스님께서 굳이 근본불교경전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그깨달음의 능력을 결국 스스로 성취해야 한다. 불교 경전 중에서 특히 아함경은 깨달음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는 방법으로 설해진다. 신(神)이나 우주의 생성 등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인식ㆍ관찰이 가능한 것부터 설해진다. 그리하여 범부의 무명 업식(業識)을 붓다의 최상의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 시키고자 한다."
.... 이 말씀은 아마도 선불교의 돈오 혹은 돈수와 관련하여 하신 말씀인듯 합니다.
그런데 아함경 즉 초기불교 근본불교의 경전에서 예류자나.. 일래자 .. 불환자.. 아라한의 깨달음 즉 道와 果를 얻는 것도 점진적인 것이라고 설했습니까? 아니면 이러한 도와 과의 증득은 찰나에 이루어진다고 하셧습니까?
선불교에서는 견성과 보림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라한과 여래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며, 무명과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며,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라한의 깨달음과 선불교의 견성보림만을 두고 볼때 과연 점수 돈오 돈수를 바르게 이야기 할수 있을까요?
"아함경에 담긴 교설들은 단순히 개념적인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ㆍ사색의 대상이다. 인도불교에서는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경전의 말씀이 교이고 그것을 관찰ㆍ사색하는 것이 선이었다."
..... 이 말씀은 특별히 선불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듯합니다. 선불교가 사교입선을 주장하고, 그 바른 의미가 무엇이든지 경전을 무시하는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니 이런 것과 비교하여 초기경전의 수행체계를 말씀하신 듯합니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선불교가 귀중히 여기는 창작불보살경인 염화시중경에는 가섭에게 열반묘심을 전한다고 합니다.
즉 염화시중경 조차도 부처님마음이란 바로 열반임을 보여주는 것이라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와 아함경은 바로 이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체계로 가득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열반묘심이 과연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열반인지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 당시의 직제자들이나 부처님원음을 접한 불제자들에게
니까야와 아함은 부처님마음에 도달하기 위한 매우 귀중한 법문들이 됩니다.
그러나 선불교는 법을 본다든가, 연기를 본다든가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화두수행을 방편으로 삼기때문에 부처님경전을 의지하지 않고 선어록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아함경과 니까야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열반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선어록은 조사의 말씀이고, 견성은 조사의 마음이라고 해야 바르지 않겠습니까?
『아함경(阿含經)』에 대하여...
'아함(阿含)'은 범어 agama의 음역(音譯)으로 "전승된 가르침"이란 뜻이다
'전승의 사실이 명백한 경전' '권위있는 경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아함경』은 단일경전이 아니라 2,000여 가지
(빨리어 니까야는 5,273 가지) 경전들의 모음이다.
이들 경전 속에 담긴 교설은 곧 불교 기초교리이며 후대 여러 불교교의(敎義) 연구의 기초가 된다.
한역(韓譯) 『아함경』은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나뉜다.
① 『장아함경(長阿含經)』....22권
주로 장편의 경전을 모은 것으로서 30경이 수록.
413년 후진(後秦)에서 불타야사(佛陀耶舍). 축불념(竺佛念)이 함께 번역.
② 『중아함경(中阿含經)』....60권
중편의 경전 222경을 모은 것.
397년 동진(東晋)에서 승가제파(僧伽提婆)가 번역.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소속.
③ 『잡아함경(雜阿含經)』....50권
주로 단편의 경전 1362경으로 구성.
443년 유송(劉宋)에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번역. 부계(有部系) 소속.
④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51권
1법에서 10까지 법수(法數)의 순서에 따라 편찬되었기 때문에 '증일'이라고 부르며, 471경이 수록.
397년 동진에서 승가제파(僧伽提婆)가 번역. 대중부 소속.
<자료발취 : [묘주 스님]의 "조계사"불교대학 강의교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