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사랑방

그대에게로의 회상 /한태영

여성국장 2010. 10. 22. 11:08

 


게으름을 저어
산그늘이 잠든 창가에 턱을 괴였지
커피향이 찻잔에 더 이상 묻어나지 않을 때
한 시대쯤 전의 디제이가 목울대를 가다듬었다

두어 평 남짓
옛 것들이 목소리를 낮추던 찻집에
늙수구레하여 건조한 바람이 불고
간지러운 소리로 낡은 영사기가 깨어났다

쓴맛의 끝이 들큰한 커피를 마시며
먼지가 켜켜이 쌓인 흑백필름을 걸어 빛을 보냈다

빛으로 깨어난 티끌들이
그대의 치맛자락을 끌고 나오고
그대의 여린 손끝에 스며 미세하게 향기를 피워 낸다
그대의 봉숭아빛 입술을 열어 나를 부르게 하면 좋겠지만
무성영화의 여배우처럼 아미를 모아 어깨만 으쓱일 뿐
다시 어두워진 불빛에 낡은 영사기가 졸고 있다

지난 것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느린 춤을 추는 것이며
왜 하나같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다가가면 더 멀리가버리는 신기루가 되는 걸까

이 철지난 찻집에
늙수구레하여 건조한 바람이 부는 날
낡은 영사기를 깨우러 올 수 밖에 없는 내가
그대의 가슴속에 있는 것들 중에 하나이면 좋겠다
흐린 중에도 사금파리처럼 빛을 내는 티끌이라도 좋겠다
2010.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