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걸려 쓴 편지...(장영희교수)
이른아침 조간신문 펼쳐들고서야 1면 상단에 실린
그녀의 비보를 접하고는 오전내내 맘이 쓰이면서
종일 마음도 무거웠습니다. 단지, 애독자일 뿐인데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5/9일 타계한 고(故)
'엄마'에게 남긴 편지다.
병상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사흘 걸려서 썼답디다.
어머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시켰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 주게 될까 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다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어머니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어머니...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저명한 영문학자인 고 장왕록 박사의 딸인 장 교수는
첫돌을 며칠 앞두고 고열을 앓다가 척추성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이 됐다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대학에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학교성적은 좋았고,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고3이 되자 아버지(고 장왕록박사)는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시며
입학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구걸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했다.
당시 친구가 총장으로 있던 서울대에 가서 사정하여도....
(서울대 사범대 교수였던 아버지로서의 무력감이랴...)
다음으로 혹시나 해서 찾아간 곳이 서강대였고.
미국 신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라 좀 다르지 않을까싶어
그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단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답니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반분하셨다고 한다.
그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 고......
(이부분을 읽을 당시 저 또한 영문모를 눈물이 울컥했더랬는데...)
서강대 영문과 출신으로 첫번째 영문학 박사라는
일부러 찾아서라도 읽는 필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진솔하고, 강인하고, 격조높고, 아름답지요
저를 때론 울리기도하고 어떨땐 웃기기도 했습니다
목발을 짚고 걷는 내게 간혹 사람들이 왜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는냐고...
휠체어를 타면 문자그대로 낮은 삶이 된다고
모든 것이 '높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
'낮은 사람으로 돌아다니기는 참 힘들다는 그녀....오히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세상이 보인다고
더 많이 볼 수 있다고........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는다" 는 그녀였습니다
"나, 비가 되고 싶다." ......최근 유작의 서문이랍디다
세상을 훨훨 나는 '나비'와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를 아우르는 이 소망처럼,
그는 정말 하늘로 올라 나비가 됐고 봄비가 됐습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난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라며
오래 전에 마음을 정했다는
고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그 내일인....오늘도
이제 붉은 노을을 준비하며 점점 기울어갑니다
고된 삶에 지친 사람들의 동반자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으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LDW
※ 고인의 저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으면서
평소 발췌하거나 마음에 담아둔 내용을 인용함